무아란..마음을 비우다가 아니라, 마음을 비운다는 그 주체가 없다는 뜻이다. 행위를 하되 행위자가 없고, 생각을 하되 생각하는 놈이 없고, 말을 하되 말하는 자가 없다. 그래서 붓다는 한 마디도 설한바가 없다라고 하신 것이다 #무아 #무아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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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er-mb5ec5sn3n Жыл бұрын
자무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저는 유투브로 불교를 접하고 불교에 관심을 갖고 법문을 찾아 들으며 지낸지 5년쯤 되었습니다 짧다면 짧다 할수도 있으나 저 혼자 신심을 키우며 공부하기란 쉽다고 할순 없겠습니다 제가아는 불교, 절은 미신인것만 같아서 전혀 관심밖이었던 불교가 사실은 우리들이 전혀 잘못 알고 있었다는걸 알고 꽤 충격적이었어요 불교는 사실 비는종교가 아니라는걸 알았습니다. 저는요즘 불교공부에 한계가 느껴집니다 불교를 더 많이 알고 공부할수록 윤회의 두려움이 커지고, 윤회를 멈출 수행은 도저히 재가자로서 법접할만한 수행의 난이도는 넘는듯하여 공부를 하면서도 환희에 기쁜게 아니라 절망이 앞섭니다 아..절대로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겠구나..절망합니다 종교를 믿으며 내가 착하게 마음먹고 살고, 남보다 양보 배려 더하며 살고, 스스로 사회에 악이 되지 않으며, 가족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뭐, 이런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면 점점더 나은 내가 되고, 그러면 윤회도 멈춰지고 ..뭐 이런 희망적인 생각이 들어야 더 열심히 신심을 키우며 밝게 살 마음이 커질텐데, 불교에서의 진리는 저런단순한 착한 교리를 설하는 종교가 아니라 수준이 너무 높고, 배울수록 어렵고, 저렇게 살면 나와 사회에 좋긴 하겠으나, 그런다고 윤회가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제가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것인지요.. 제가 배우고 느낀 불교는 절대 저렇게 단순한 착한 삶으로 설명되는 종교가 아닌데 말이예요.. 팔정도를 행하며 살아야 궁극적으로 윤회가 멈춘다는 것은 사실인지.. 팔정도를 재가자가 어찌 완성한단 말인가요 정어, 정업, 정명은 어찌어찌 한다해도 정진에 관련된 항목은 어찌 가능할까요..그게 단순히 가부좌하고 앉아 하루 일정시간 명상하라는건 아닐텐데요.. 아니면 재가자는 윤회를 끊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욕심, 욕망인지요.. 아니면 불교의 본질을 너무 윤회를 끊고 싶다는 것에 두는것이 잘못된 방향인지요.. 하지만 초기불교, 근본불교를 설하시는 많은 곳에서의 법문을 듣다보면 마지막 목적이 윤회를 멈추는것이라는 생각이 들던데.. 요즘 너무 혼란이 와서 공부에 집중이 되질 않습니다 도와주세요.. ()()() 긴글..너무 죄송합니다 ()()()
@foolBuddha Жыл бұрын
안녕하세요. 긴 댓글 잘 읽었습니다. 님의 신심어린 고민과 불법에 대한 깊은 공부가 느껴집니다. 불교 수행의 근본적인 목적이 윤회를 벗어나는 것, 생사윤회를 벗어나 열반에 드는 것, 그래서 다시는 고통의 사바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윤회는 나쁘다라는 개념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윤회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윤회는 모든 생명의 기본현상이며 이 삼라만상을 유지하는 우주의 법칙이자 질서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자연입니다. 우리 모두가 >을 갖고 있는데 왜 우리는 윤회의 삶 속에 있을까요? 윤회한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성은 본질적으로 윤회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습니다. 붓다는 생로병사 네 가지 고통을 말씀 하셨는데..생로병사가 고통이 되는 이유는 집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삶에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고, 젊음에 집착하기 때문에 늙음이 싫고, 건강에 집착하기 때문에 병이 싫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집착을 놓는다면..삶과 죽음이 하나요. 모두가 자연일 뿐입니다. 윤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반을 좋아하기 때문에 윤회가 싫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보살은 오히려 자발적으로 윤회에 뛰어듭니다. 윤회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마음을 놓으셔야 합니다. 굳이 불교의 본질을 말하자면 무소유가 아닌 무집착입니다. 해탈하고자 하는 것도, 생사를 벗어나겠다는 것도 모두 형태는 다르지만 욕망의 다른 형태입니다. 그것 역시 물질적인 욕망만큼이나 세속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거다 저거다 분별심을 놓으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진리입니다. 시장의 시끌벅적한 상인들의 소리도 관음의 법문이요. 출근하는 남편과 등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 것도, 새벽에 일어나 염불하고 절하는 것 만큼 불법의 다른 표현입니다.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고 오늘은 선물이란 말이 있듯이 지금 이 순간의 삶에 집중하십시오. 우리 앞에 있는 이 세상이 곧 열반의 세상입니다. 요즘은 법문영상을 못 하고 있지만..언제고... 선생님의 질문주제로 같이 배워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서로에게 스승이자 도반입니다. 감사합니다. 자무합장
@@user-mb5ec5sn3n 갈애가 있으면 윤회하고, 갈애가 없으면 윤회하지 않는 답니다. 우리의 몸과 정신이 무상, 고, 무아임을 통찰하면, 염오가 생겨서 탐욕, 갈애가 사라진답니다.
@user-ux9qp8bg1m3 күн бұрын
님의글에 깊은 사색과 고뇌가 느껴집니다 글의 내용으로보아 대승불교와 초기불교 즉 근본불교의 교학이 뒤섞여서 혼란이 온듯 싶습니다 그렇습니다ㆍ 대승불교는 윤회를 끊는것은 일반범부로 시작한 인간들은 절대 아라한성자가되어 윤회를 끊게 되지못할 범접하지 못할 경지로 호도하고 있지요 오히려 자무스님의 댓글보단 8207님의 댓글에 더 사유하시고 귀를 더 귀울이세요 8207님이 제대로된 공부가 잘되신 수준높은 도인입니다 먼저 근본불교 경전인 대념처경을 먼저 사서 탐독하세요 대념처경에 석가모니가 직접 적어도7년이면 아라한성자가 된다고 밝혀놓았습니다 대념처경은 사념처위빠사나 즉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어 윤회를 벗어난 수행법이 사념처 위빠사나 인데 그 하는 방법을 설해놓은 경전입니다 사념처위빠사나는 팔정도의 정념과 정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첨언하건데 정정진은 다름이 아니라 선한 업은 지속적으로 키워나가고 악한업은 뿌리째 뽑고를 쉬지않고 지속하라가 정정진의 바른 의미이니 절대도달할수 없는 항목이 아니지요 좀더많은 댓글을 달고 싶지만 지면상 줄이겠으나 좀더 궁금한 사항이 있으시면 카톡이나 문자주세요 그리고 반드시 근본불교경전인 아함경과 니까야를 반드시 읽으시면 윤회를 끊는일이 얼마나 장엄하고 수승하고 또 한생안에 끊을수 있게된다는 자명한 사실을 그 경전들의 탐독을 통해 확신하게 될것입니다 이승민 아라한 법사 010-6253-9693
@user-ux9qp8bg1m3 күн бұрын
첨언하자면 흔히 갈애라고하면 단지 좋아하고 끌어당기는 흔한 마음을 갈애라고 하는 작자가 있습니다 그렇게 사유해서는 절대 해탈과 열반에 도달할수가 없습니다 갈애란 단지 좋아하고 끌어당기는것이 도가 지나쳐 지속적으로 갈구하고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원하는것을 말하며 단순히 좋다ㆍ먹고싶댜 자고싶다 이런것들은 갈애에 범주에 해당하지않습니다 너무좋아서 저것을 반드시 지속적으로 취하지않으면 난 화가나 등의 집착을 동반한 끊임없는 끌어당기는 마음을 갈애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사념처위빠사나수행을 닦는 이유는 단순한 애 즉 좋아함이 느껴질때에 과하지않게 취하고 더이상의 집착과 갈애의 끈에 메어 그 행위에 달라붙는 마음을 내려놓기위해 사념처위빠사나 수행을 하는것입니다 010,.6253-9693 질문있으면 문자나 카톡주세요 이승민 아라한법사
듣고 들어도 좋은 법문입니다....스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 시켜주시니 감사합니다.
@user-nq7vh2jz7x10 ай бұрын
삼보에 귀의하옵니다 덕분입니다
@user-qk3gu1dc1e Жыл бұрын
스님 감사합니다. 고통스럽고 혼자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함든 문제를 만날 때 그 깊은 터널에서 역시나 가장 의지처로 붙잡게 되는게 부처님 인것 같아요. 그럴경우 저는 가장 먼저 바보붓다 채널로 옵니다. 많고 많은 스님들 채널과 법문들이 있지만 저는 바보붓다가 정말 좋습니다 편합니다. 하루빨리 깨달음을 얻어 이 고통이 다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되면 하고 바래봅니다. 죽고싶을만큼 고통스러움을 몸서리치게 느끼니 비로소 부처님의 사성제가 진리 중의 진리구나 라고 생각됩니다. 언제나 좋은 법문 감사드립니다
@HAPPY-si6mq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user-yi5rj1zg1o Жыл бұрын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 감사드립니다.
@user-ws9pe7wk8n6 ай бұрын
여러 스님에게서 온갖 책에서 읽은 개론들이 스님에게서 한 상 잘차려진 법의 밥상을 잘 받습니다 늘 ~~~조금만 길었으면 좋겠습니다 ~~~!자무스님 마하반야밀
생존일여ㆍ노무현 대통령이부엉이 바위에서 투신 하기전 봉화의 어느 절 주지 스님이 죽기전까지 일존일여 의 의미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ㆍ글의 뜻을 이해를 못 했었는데ㆍ오늘 알아차림을ㆍ깨달음을 느꼈읍니다!!! 법문 감사 합니다 ! 안개가 확 걷히고ㆍ눈이 확 떠지는 느낌 이네요ᆢ
@user-ld6tz5lm6f5 күн бұрын
삶과 죽음은 하나다 ? 생존일여 !!!
@user-fx6po8gr2m Жыл бұрын
바다가 있는가요 바다가 없으니 파도가 무엇인가요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이가요 논리는 무엇인가요 착각은 무엇인가요 있는 그대로란 무엇인가요
@scso33024 Жыл бұрын
바다면서 동시에 파도인, 개별 존재가 전체와 동시에, 이생에서의 인과법칙이 무한 생의 무한 법칙과 함께 춤을 추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집착과 집착 없음이 찰라에 교차하는 현상이 이생의 모습인 듯 합니다. 어떻게 이생(파도)의 찬란함이 무한의 바다에서 동시적 마음으로 나투될 수 있을까요?
@user-fx6po8gr2m Жыл бұрын
깨달음이 있는가요 무아는 무엇인가요 가르침은 논리인가요 망상이 왜 나쁜가요 과거는 우리가 아닌가요 미래는 그누구도 모르잖아요
@user-po9zs7kk4l Жыл бұрын
스님 동영상 강의 고맙습니다.. 혹시 법당에 가서 직접 법문을 듣는 방법도 알고 싶습니다.
@foolBuddha Жыл бұрын
아직 소승의 수행처는 여러 인연상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연길 열릴때가 있겠지요. 감사합니다
@user-po9zs7kk4l Жыл бұрын
@@foolBuddha 네,그렇군요.. 언젠가 그 인연의 때가 되실때 저도 그 자리에 같이 참석하게 되리라 생각되네요...감사드립니다...
@user-ys2bg5hr7n4 ай бұрын
부처는 나를 부처로보는데 나는 부처를부처로 보는구만ㅡ
@user-qk3gu1dc1e Жыл бұрын
스님 인간들의 잔인한 행위로 학대받는 동물들,가깝게는 강아지 고양이들을 혼자 힘으로 다 구하지 못하는 무력감에 빠져서 삶 자체가 고통이 되어버렸을때 무력감에서 빠져나와 다시 힘을 내게 할 수 있는 수행법이나 경전이나 좋은 법문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foolBuddha Жыл бұрын
네 알겠습니다. 사실 붓다께서도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은 다 제도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의 평화, 행복을 잃지 않는 상태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다 구하면 좋겠지만 다 구할 수 없는 상황과 인연이란게 있습니다. 마음이 애끓고 무력한 것은 그것을 거슬리고 너무 앞서가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것 역시 자기 욕심에 사로잡힌 마음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 붓다나 예수처럼 혹은 체게바라처럼 전투적으로 살 수는 없는 것처럼 모든 인연법따라 사는 것이죠.
@user-xp8iw9ut7n9 ай бұрын
본래로 돌아가면 파도였던 나는 사라집니다 그러면 본래인 바다는 바다로 의식하지 않는거지요? 무랑 차이가 뭔지 궁금합니다
@foolBuddha9 ай бұрын
본래의 바다인 법신과 합일되는 원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그 단계는 그 누구도 뭐라 형용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로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있다 없다를 넘어선 자리입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없을 무의 아무것도 없는 그 무가 아닙니다.
@user-xp8iw9ut7n9 ай бұрын
@@foolBuddha 답 감사드립니다 궁금해서 여기저기 댓글을 달았는데 아무도 말씀이 없어서ᆢ 내가 궁금해 하는것이 이상한건가ᆢ글로 배워서 그런 의문이 생기는건가 했습니다 아직도 다 모르겠지만 답 주심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foolBuddha9 ай бұрын
@@user-xp8iw9ut7n 모든 질문은 귀중합니다. 거기에 어디 높낮이가 있겠습니까? 모르는 그것이 곧 화두의 출발입니다. 숭산스님은 오직 모를뿐 하셨지요. 눈은 눈 자체롤 볼 수 없고 눈으로 그냥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가 눈이 있다고 알 수 있는건 눈의 작용이 있기에 눈이 있음을 다만 압니다. 그러나 눈이 눈으로 보려하면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법신도 그와 같다고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걷고 걷다보면 어느덧 딱 하는 순간이 있을 겁니다. 하루하루 늘 여여하시고 여법하세요. 경청해주셔 감사합니다.
@user-tc3kd3uy8c7 ай бұрын
바다와 파도로 비유하신다면 파도가 굳이 수행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집니다. 개별 객체로 존재했을때 수행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바다와 파도로 비유하시면 삼세인과도 성립할수가 없다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