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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분해간장의 정명(正名)
인류는 지구 출현 이래 가장 안전한 식생활을 하고 있다. 음식을 먹고 죽거나 탈이 나는 일이 극단적으로 줄었다. 작은 식품 사고라도 나면 언론에서 난리가 나는데, 그만큼 식품으로 인한 사고가 드물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금처럼 건강하고 오래 살게 된 것은 과학 발전 덕분이다. 또, 국가가 식품을 안전하게 관리하는 덕분이다. 마트에서 식품을 선택하며 건강에 위해하지 않은지 과도하게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지나친 의심은 음식 맛을 버린다.
산분해간장의 위해성은 걱정할 것이 없다. 산분해간장의 제조 과정에서 염산과 양잿물이 들어가도 최종 결과물은 안전하다. 3-MCPD 기준치도 과학자와 국가가 알아서 잘 관리를 할 것이다. 소비자는 과학자와 국가의 판단을 믿으면 된다. 그들이 가끔은 실수를 해도 아예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는 바르지 않다. 소비자가 식품의 안전에 대해 최종적으로 기대야 할 곳은 과학자와 국가이다. 그들이 산분해간장이 안전하다고 하면, 이를 뒤집을 만한 과학적 자료가 제시되지 않는 한, 안전하다고 판단해야 한다.
국가는 제외하고, 과학자의 역할은 거기까지이다. 식품의 안전성을 소비자에게 확인해주는 일을 했으면 임무를 다했다. 과학자가 식품의 명칭까지 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식품의 명칭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탈나지는 않는다. 식품의 명칭은 그 식품이 소비되는 사회의 문화적 전통과 소비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식품의 명칭에 자본이 개입을 한다. 식품 그 자체보다 식품의 명칭이 시장점유율을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품의 명칭에 대한 논쟁은 소비자와 자본, 그리고 국가가 감당해야 하는 문제이다.
간장은 우리 민족이 콩을 발효하여 얻은 액체에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 문헌에 처음 등장하나 간장이라는 식품이 그 이전부터 있었고 그 이름의 역사는 역시 길다. 1년 된 간장은 햇간장이고, 5년 정도 묵히면 진간장이라 한다. 햇간장은 맑아서 청장, 국에 어울려 국간장이라고도 한다. 오래 묵힌 진간장을 씨간장이라 하고, 이를 햇간장에 첨가해 집안의 간장 맛을 물린다. 발효 과정에 해산물이 들어가면 어간장이 되고, 고기 맛을 더하면 육간장이 되며, 여러 재료로 맛을 더하면 맛간장이 된다. 간장은 간장이라는 식품 그 자체만을 뜻하지 않는다. 간장이라는 말에는 한반도에서 콩 발효 액체를 일상 음식으로 먹어온 사람들의 정서와 정신이 담겨 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콩 단백질을 굳이 발효하지 않아도 아미노산액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산분해 방법으로 간편하고 값싸게 간장 비슷한 액체를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에 산분해간장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자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간장이라는 이름의 액체를 먹고 있기 때문에 간장이라 이름을 붙여 판매를 한 것이다. 산분해간장이란 명칭이 결정될 때에 소비자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만약에 간장이란 이름이 없었으면 콩 단백질을 산분해하여 얻은 아미노산액은 다른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감칠맛이 난다고 감칠맛액이라 했을 수도 있다. 산분해간장이라는 작명은 전적으로 콩 발효 액체를 간장이라는 불러온 사람들의 정서와 정신을 차용한 것이다. 이렇게 자본에 의해 차용당한 간장에 대한 정서와 정신은 깨지고 비틀려 마침내 카오스의 상태로 이르렀다. 5년은 묵혀야 붙였던 진간장이라는 명칭을 산분해간장에 양조간장을 더한 혼합간장이 가져갔다. 산분해간장과 혼합간장을 주요 제품으로 내는 식품회사가 발효명가라고 간판을 달았다.
산분해간장이 간장과 비슷한 맛을 내어도 간장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원료가 콩 단백질로 같고 그 결과물이 비슷하다 해도 과정이 확연히 다르다. 한반도 사람들이 오랜 시간 간장이라는 명칭에 응집시켜온 정서와 정신은 산분해로 얻은 간장 비슷한 액체에는 없다. 산분해간장을 비발효간장이라 하자는 주장도 있는데, 이 역시 간장이라는 명칭을 붙이는 것이니 적합하지 않다. 합리적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간장맛소스라고 해야 맞다. 바나나가 들지 않았음에도 바나나 맛이 나는 식품에 ‘바나나맛 **’이라고 붙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식품의 명칭은 식품공전에 올려짐으로써 공식화한다. 최종에는 국가가 결정하는 셈이다. 이때까지 식품의 명칭을 정하는 과정에 소비자는 크게 관여하지 못했다. 자본의 결정이 우선했다. 산분해간장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산분해로 얻어진 아미노산액을 간장맛소스라고 했으면 간장맛소스를 첨가한 간장에다 진간장이라고 하지도 못했을 것이며 간장맛소스를 제조하며 발효명가라는 간판을 내걸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 산분해 아미노산액의 이점이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값이 싸며 안전성도 확보되어 있다. 간장업계에서 내몰아야 한다는 주장은 과도하다. 과학적 성과를 적절하게 이용해야 한다. 식품공전에서 한식간장과 양조간장의 분별은 손댈 것이 없다. 산분해간장과 혼합간장은 개명을 해야 한다. 산분해간장은 간장맛소스, 혼합간장은 간장맛소스가 첨가된 양조간장이니 조미간장이 적합하다. 소량의 양조간장이 들어간 간장맛소스를 조미간장이라 할 수는 없으니 양조간장이 70% 이상 들어가야 조미간장이라 규정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식품 제조자는 소비자에게 자신의 식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케팅을 하려면 이 의무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하는 명칭을 고집하게 되어 있다. 이때에 소비자의 알권리를 지켜주어야 하는 의무가 국가에 있다. 국가는 소비자의 혼동을 유도하는 ‘마케팅적 명칭’의 사용을 막아야 한다. 소비자가 국가에 세금을 내는 이유이다.
공자는 정치를 맡기면 무엇부터 하겠느냐는 질문에 “이름을 바로잡겠다(正名)”고 했다. 이름에 부합한 실제가 있어야 그 이름이 성립한다. 실제에 맞는 명칭을 사용해야 세상은 바로잡힌다. 간장 논쟁도 다르지 않다. 이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