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최후의 전투로만 알려진 노량해전? 노량해전의 진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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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민의 잡지사

이강민의 잡지사

7 ай бұрын

잡지사 방송 | 매주 월~금 오후 7시30분~8시 CBS 라디오 표준FM 98.1MHz
※12/19 화요일 방송분
#잡다한지식사전 #노량 #박광일

Пікірлер: 220
@zapzisa
@zapzisa 7 ай бұрын
00:15 개봉 D-1! 노량해전 알아보기 01:51 노량의 위치와 ‘량’의 의미 🗺️ 04:38 왜성을 쌓고 버틴 왜군 🏯 08:00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왜의 철군 09:33 일본이 띄운 연락선 한 척 12:30 고니시-시마즈 vs. 조-명 연합군 14:22 진린의 협조와 판옥선을 탄 등자룡 15:23 피 튀기는 백병전이 된 노량해전 ⚔️ 19:10 성웅의 마지막, 임진왜란의 마지막 21:29 퇴각하는 적군을 상대했던 이유 24:43 이순신에 대한 평가와 진린의 재조명 💡 26:33 최민식 vs. 박해일 vs. 김윤석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조선군이 일본군의 사령관을 한 명조차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조선에게 운이 좋았다. 만약 살해했다면 일본군은 철수를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령관을 잃고 있던 조선은 일본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조선은 홍타이지에 항복해 청국의 속국이 되어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주게 되었다. 즉 일본 대신 청국이 조선 종주국이 된 것이다.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일본군의 지휘관은 전원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만약 일본군의 지휘관에 사망자가 나왔다면 일본군은 귀국을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의 희생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런 곳까지 생각이 돌아오지 않는 바보 같은 사령관이었다. 명군은 훨씬 현명했다. 불과 몇 년 후에 청국과 싸웠을 때 일본에 구원을 요구했다. 전쟁이란 외교수단의 하나다. 이순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리석은 사람이다.
@shipowner77
@shipowner77 7 ай бұрын
어제 극장에서 노량을 보고 나오는데 600여명이 모두 숙연해지는 분위기 였습니다 재미있는 역사이야기 잘 보았습니다 😆👍👏👏👏
@love3217
@love3217 7 ай бұрын
어쩌면 이시대에 이순신 장군님같은 분이 가장 필요할듯하네요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않는 그런 분이... 이순신장군님같은 위대한 위인을 잊지말고 더 감사하게 이땅에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금하게됩니다 방송 감사합니다
@HotSoil510
@HotSoil510 7 ай бұрын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4go8go42
@4go8go42 6 ай бұрын
왜 나라를 위해 이순신 장군 같은 분들만 기다립니까? 위인들을 잊지않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다리지 말고 우리 스스로 지켜나가려는 의지가 아닌가요? 지금 우리의 모습을 이순신과 우리민족의 영웅들이 보면 뭐라 할까요? ㅉㅉㅉ 나약한 것들. 이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스스로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갖고 나서려는 자세는 없습니까? 대한민국은 위인들의 나라입니까? 당신과 우리는 무엇이고 누구입니까? 영웅주의, 사대주의, 노예근성에서 언제까지 묻혀 살 것인가요?
@HotSoil510
@HotSoil510 6 ай бұрын
@@4go8go42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일본 기록에는 이순신의 이름은 한 번밖에 쓰지 않았다. 그가 죽은 것뿐이다. 일본에 있어서 이순신은 기록할 필요가 없는 약한 존재였다.
@gwangdemask1913
@gwangdemask1913 2 ай бұрын
그러기엔 이시기에 선조같은 놈이 너무 많아요.
@user-kg5jt9ov5r
@user-kg5jt9ov5r 7 ай бұрын
인류전사 최고의 해군사령관 아닐까 합니다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일본 기록에는 이순신의 이름은 한 번밖에 쓰지 않았다. 그가 죽은 것뿐이다. 일본에 있어서 이순신은 기록할 필요가 없는 약한 존재였다.
@user-ps1ur9be1r
@user-ps1ur9be1r 7 ай бұрын
도망가는적을 끝까지 처부순것은 장래 재침의 씨앗을 없애기위함 입니다.
@user-qi6uu7on7d
@user-qi6uu7on7d 7 ай бұрын
진린이 총사령관이다. 이순신은 현지인 지원배속 부대장에 불과해서 작전 발언권이 없다. 한국전때 한국해군이 미7함대 지휘했다는 희대의 개소리란다. 진린이 자신의 공적을 위해 순천을 고립시키고 이순신의 조선함대는 현지인 부대로 전초 임무를 수행하며 앞에섰다가 시마즈군에게 일빳다로 깨지고 뿔뿔이 흩어져 토껴 전선에서 사라진다.
@4go8go42
@4go8go42 6 ай бұрын
영상을 끝까지 보세요. 부끄러워 질겁니다.
@dudwnsrh7332
@dudwnsrh7332 6 ай бұрын
왜요?​@@4go8go42
@user-wk5px8nm2n
@user-wk5px8nm2n Ай бұрын
​@@4go8go42그게왜 부끄러움?
@user-mh3tw9rk5y
@user-mh3tw9rk5y 7 ай бұрын
이순신장군님과 이름없는 조선수군들께 감사합니다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일본군의 지휘관은 전원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만약 일본군의 지휘관에 사망자가 나왔다면 일본군은 귀국을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의 희생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런 곳까지 생각이 돌아오지 않는 바보 같은 사령관이었다. 명군은 훨씬 현명했다. 불과 몇 년 후에 청국과 싸웠을 때 일본에 구원을 요구했다. 전쟁이란 외교수단의 하나다. 이순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리석은 사람이다.
@catherinejang1436
@catherinejang1436 7 ай бұрын
교수님 설명을 참 잘하시네요. 목소리나 톤, 자세, 속도 다 듣기 너무 편하고 설명에 필요한 포인트도 적절하게 잘 잡으시네요. 덕분에 잘 배웠습니다.
@mica-ya
@mica-ya 7 ай бұрын
노량은 마음 아파서 차마 못 볼거 같긴 한데 한편으로 노량에서 전사 하지 않고 살아 남으셨더라도 선조에 의해 오히려 토사구팽 당해서 더욱 힘든 시간이 될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긴하네요 ㅜㅜ 최민식의 용장 박해일의 지장 김윤식의 명장의 모습을 다가지고 계셨던걸 김한민 감독님께서 잘 파악해 적용하셨던거겠지요?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조선군이 일본군의 사령관을 한 명조차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조선에게 운이 좋았다. 만약 살해했다면 일본군은 철수를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령관을 잃고 있던 조선은 일본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조선은 홍타이지에 항복해 청국의 속국이 되어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주게 되었다. 즉 일본 대신 청국이 조선 종주국이 된 것이다.
@parmenideskim9739
@parmenideskim9739 7 ай бұрын
1970년 초등학교 입학했을때 초등학교 강당가는 복도의 벽에 걸려 있는 커다란 그림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해가 져서 어두운 바다에 엄청나게 많은 일본배들이 부셔지고 불타고 있고 그 위로 조선 수군이 쏜 불화살이 하늘을 뒤덥고 있는데 그림 한 쪽 판옥선 망루에 총에 맞아 쓰러진 이순신 장군을 다른 장수들이 부축하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노량해전을 그린 그림인데 이상하게 그 그림이 5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노량해전에서는 조선군에서는 이순신뿐만 아니라 이영남(가리포 승사), 방덕룡(낙안군 수), 고득 장(흥양현감), 이히라 등 수많은 장관이 전사했다 . 조선측은 장군의 전사나 손해 과다로 통제가 부족해, 작전 행동의 계속이 불가능해져 일본군은 무사 귀국했다. 이들은 조선문헌에 기재된 사실이다. 중국의 '명사'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이 시작된 이래 7년, 사람은 10만 장병을 상실해, 백만의 병량을 소비해도 명국과 속국(조선)이 이길 전망은 없어 , 단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죽음에 이르고, 전쟁은 종식했다”고 총평했다. 즉, 한국인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군이 패주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문헌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한국인이 거짓말쟁임임을 증명하고 있다.
@dpdp-zr3uk
@dpdp-zr3uk 7 ай бұрын
무엇보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에 고통받는 민중들에 대해 당사자로서 같이 고통을 느끼며 나누려 하였던것이 진심으로 느꺼집니다. 난중일기를 보면 배신자나 물건 강탈자에 대해서는 과감히 처단하였으며,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입을까봐 적을 쫓을 때에도 다른 섬으로 상륙하지 않도록 추격에 있어서도 강약을 조절하는등 세심한 지도자였죠.
@HotSoil510
@HotSoil510 7 ай бұрын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일본 기록에는 이순신의 이름은 한 번밖에 쓰지 않았다. 그가 죽은 것뿐이다. 일본에 있어서 이순신은 기록할 필요가 없는 약한 존재였다.
@user-cv8ny5pw1m
@user-cv8ny5pw1m 2 ай бұрын
역사와 문학은 다릅니다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일본군의 지휘관은 전원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만약 일본군의 지휘관에 사망자가 나왔다면 일본군은 귀국을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의 희생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런 곳까지 생각이 돌아오지 않는 바보 같은 사령관이었다. 명군은 훨씬 현명했다. 불과 몇 년 후에 청국과 싸웠을 때 일본에 구원을 요구했다. 전쟁이란 외교수단의 하나다. 이순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리석은 사람이다.
@user-qm6oi5fp4f
@user-qm6oi5fp4f 7 ай бұрын
박광일 쌤 은근 옷 잘 입으셔요. 색이나 핏이나 튀지 않으면서도 몸매에 잘 어울리시게 입으시는 듯요. 오늘 오렌지 스웨터도 색이 되게 예쁘네요. 😊
@user-kn7uo1ev3s
@user-kn7uo1ev3s 7 ай бұрын
이순신 장군 이야말로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장군다운 장군중의 장군 같습니다. 위대한 대한민국 만세~~~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에 대해 우세하게 싸운 것은 전쟁 개시 후 불과 3개월의 한산도 해전까지였고, 그 후 이순신은 7년간 모두 패전을 이어갔다. 이순신은 무서워 전쟁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에 백의병으로 강등됐다. 원균의 사망으로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 직후의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에는 조수의 흐름에 의해 일시적으로 조선이 유리해져 일본군의 크루시마가 죽었지만 저녁이 되어 조수가 바뀌자 조선군은 도피했다. 일본에 쫓긴 이순신은 9월 21일에는 멀리 전라도 북단의 고군산도(군산 앞바다)까지 도망쳤다. 그 후 순천해전 등에서도 이순신은 패퇴하고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에 의해 쏘여 죽였다. 이상이 조선왕조실록이나 이순신의 일기에 의한 진실이다. 일본 기록에는 이순신의 이름은 한 번밖에 쓰지 않았다. 그가 죽은 것뿐이다. 일본에 있어서 이순신은 기록할 필요가 없는 약한 존재였다.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한국인은 왜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이긴 것은 한산도 해전이 마지막이며, 그 후 7년간 이순신은 기습 공격했지만 매번 일본 수군에 의해 격퇴되고 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명량 해전에서도 이순신은 결국 200km나 북쪽으로 도망치고 있다.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고,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침몰한 기록도 없고, 잔해도 발견되지 않았다. 일본 기록에 이순신이 쓰여 있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의 사망을 기록한 것이다. 일본 수군에게 이순신은 강한 적이 아니었던 증거이다.
@user-zs7mr3vq8r
@user-zs7mr3vq8r 7 ай бұрын
노량~~ 정말 기대가 큰 작품인데 ~~ 이순신 장군님의 마지막 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네요. 내일 개봉이네요... 이번 주말에 꼭 보러가야 겠네요.
@user-yh8hm7xi2w
@user-yh8hm7xi2w 7 ай бұрын
박광일쌤 티 잘 어울려요 노량해전에 대해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user-ch7ol7bb5h
@user-ch7ol7bb5h 7 ай бұрын
실제로 이순신 장군의 역대 해전들 중 가장 대규모 병력이 투입된 총력전이 노량해전이죠. 일본군이 워낙 백병전에 최강이라 이순신 장군의 군함대들은 웬만해서는 백병전을 하기보단 원거리에서 대규모 함포전을 개시하는 위주로 전쟁하는데 노량해전만큼은 워낙 치열한 대규모 해전이다보니 백병전도 엄청나게 전개됬다함. 그리고 전사한 이순신 장군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노량해전에서는 조선군에서는 이순신뿐만 아니라 이영남(가리포 승사), 방덕룡(낙안군 수), 고득 장(흥양현감), 이히라 등 수많은 장관이 전사했다 . 조선측은 장군의 전사나 손해 과다로 통제가 부족해, 작전 행동의 계속이 불가능해져 일본군은 무사 귀국했다. 이들은 조선문헌에 기재된 사실이다. 중국의 '명사'에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이 시작된 이래 7년, 사람은 10만 장병을 상실해, 백만의 병량을 소비해도 명국과 속국(조선)이 이길 전망은 없어 , 단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죽음에 이르고, 전쟁은 종식했다”고 총평했다. 즉, 한국인이 말하는 것처럼 일본군이 패주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문헌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한국인이 거짓말쟁임임을 증명하고 있다.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일본군의 지휘관은 전원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만약 일본군의 지휘관에 사망자가 나왔다면 일본군은 귀국을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의 희생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런 곳까지 생각이 돌아오지 않는 바보 같은 사령관이었다. 명군은 훨씬 현명했다. 불과 몇 년 후에 청국과 싸웠을 때 일본에 구원을 요구했다. 전쟁이란 외교수단의 하나다. 이순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리석은 사람이다.
@Durability-S
@Durability-S 7 ай бұрын
와 박광일선생님 마지막 평론이 진짜 충격이네요 저도 이순신역을 맡은 세명의 배우중 누가 제일 이순신같을까 생각 했었는데 모두가 이순신장군의 모습이 아닐까가 맞는것 같습니다.
@wmf546
@wmf546 7 ай бұрын
지릴하지마세요 답이어디있어 븅시니가
@user-qm6oi5fp4f
@user-qm6oi5fp4f 7 ай бұрын
전 “박광일 선생님 마지막 평론”이라고 하셔서 오늘이 마지막 출연이신가!!!!! 아니 이럴수가!!!! 하고 놀랬지 뭐예요 😅😅😅😅
@Durability-S
@Durability-S 7 ай бұрын
@@user-qm6oi5fp4f 영상 마지막 부분의 평론이라고 썼어야 했는데 다른 의미로 전달되었네요 ㅎㅎ
@user-yv9ix7dq4r
@user-yv9ix7dq4r 7 ай бұрын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user-vm4eg3oq4k
@user-vm4eg3oq4k 7 ай бұрын
이순신 장군님과 세종께서 지켜 주신 나라입니다 최근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이 뉴스등에 많이 나와 안타깝지만 바르게 사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시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바른 나라로 남아있기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들께서 모두 존경하시는 분이니 장군님께서 우리 모두보다 어른이신듯합니다
@user-ko2kt5jk5z
@user-ko2kt5jk5z 7 ай бұрын
수고하셨습니다 언제나 항상 재미있게 잘보고있습니다 늘 화이팅입니다 ^^감기조심하세요
@user-qm4gp7rn9k
@user-qm4gp7rn9k 7 ай бұрын
최애 채널~🎉 항상 잘 보고 있습니다. 이정도 퀄리디면 50만,100만은 기본으로 가야지요~~^^
@user-le2ng7qx3o
@user-le2ng7qx3o 7 ай бұрын
와 너무 설정 잘해주시네요 너무너무 재밌었어요... 노량 너무 기대되요!!
@D0UB7E_JAM
@D0UB7E_JAM 7 ай бұрын
영화한편 본것처럼 감동입니다 설명 감사합니다~
@user-tz7cw7gs2d
@user-tz7cw7gs2d 7 ай бұрын
어제 봤는데 눈물이 나더라구요
@HotSoil510
@HotSoil510 7 ай бұрын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user-bc1ww3po5i
@user-bc1ww3po5i 7 ай бұрын
중국침략에 대항했던 을지문덕장군, 중국의 말발굽에 짓밝힌 나라를 구한 고려시대 강감찬장군, 일본침략에 맞서 싸운 이순신 장군 같은 진정한 애국자들이 있어 비로서 오늘같은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훌륭한 조상님들께 머리숙여 경의를 표합니다
@HK-ue9fh
@HK-ue9fh 7 ай бұрын
요나라를 중국으로 보는건 너무한디 ;;; 차라리 고구려가 한,위,진 ,수,당과 투쟁한게 나은 예시일듯
@hotworkkim
@hotworkkim 7 ай бұрын
거란은 중국아니다 하나의 중국에 동참하지마라
@user-bc1ww3po5i
@user-bc1ww3po5i 7 ай бұрын
@@hotworkkim 역사공부나 제대로하라..조선족이나 좌파가 아니면 헛소리같은 얘기하지마라
@hotworkkim
@hotworkkim 7 ай бұрын
@@user-bc1ww3po5i 역사공부는 니가해 거란이 왜 중국이야 몽고도 여진도 돌궐도 흉노도 중국이냐
@user-bc1ww3po5i
@user-bc1ww3po5i 7 ай бұрын
@@hotworkkim 중긕이 지들 역사라고하고 이미 세계도 다 중국역사로 알고있다. 중요한건 우리 민족이 중국놈들한테 침략을 당하고 유린당하고 도륙당했다는것이다.. 무식하게 억지쓰지말고 과거의 중극만행에 대해서 제대로 비판이나해봐라..벙어리처럼 있지말고...ㅉㅉㅉ
@user-hp8et4ep4g
@user-hp8et4ep4g 7 ай бұрын
이강민 편집장님! 썬킴쌤처럼 실내에서 목도리 두르고 계시고 오로로로록 출발! 이러는 거. 미춰버리겠네요 ㅠㅜ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선조하고 전투환 누가 더 나쁜 놈일까요?
@user-tt2lr8de5w
@user-tt2lr8de5w 7 ай бұрын
노량 상영시간2시간 이상 이지만 넘 재밌겠 봤슴다 시간 순삭입니다
@maykim8916
@maykim8916 7 ай бұрын
난세가 영웅을 만들고, 진짜 군인을 구별할 수 있는 때이다. 최근 서울의 봄 영화가 흥행인데, 한국 군인들은 이순신 장군에게서 진정 깨우침을 얻었는가? 자신의 영달을 위해 정권을 찬탈하는 도구로 사용할 것인가?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게 맞나? 지금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그대들이 이나라를 지키는 마지막 희망이다.
@Horang2.
@Horang2. 7 ай бұрын
퇴각하는적을 쫓아 섬멸하려고했던 이유를 대부분 다시는 쳐들어오지못하게 하려고 했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일부에 불과함 백성들이 코가 잘리고 귀가잘리고 돌아다니는걸 보며 통곡하고 통탄해하며 분노해마지않으셨던분임 이건 그에대한 분노가 폭발한 전투 그자체였음
@HotSoil510
@HotSoil510 7 ай бұрын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Horang2.
@Horang2. 7 ай бұрын
@@HotSoil510 일제강점기들어서 번역에 오류가 많은 기록을 어디서 퍼온듯싶은데 해명하자면 남자노비의 집에서 그저 잠만잤을뿐인데 여노비와 동침을 했다는등 여진과 잠자리했다는 등의 기록 다수는 오역이라고 판명났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대상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법에 어긋나는 불륜정사를 이순신이 저지르고 그것을 일기에 적었다는거 자체가 오류입니다 당시 이순신의 휘하에 있었던 장수나 부하들은 그가 진중에서 띠를 풀고있거나 방종맞은 모습을 보지못했다는 기록이 있을정도입니다 님이퍼오신 기록은 그저 근처에만 있어도 함께있기만해도 잤다 동침을 했다 성관계를 했다라는 잘못된 오역으로 만들어진 난중일기입니다 저중에 남자도 있는데 남자랑도 동침했을리가 없고 가능성이 있다치더라도 그것을 입증할 자료가없습니다 일제시대만들어진 오역본을 굳이 퍼뜨리면서까지 충무공의 체면을 깎지마시길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조선군이 일본군의 사령관을 한 명조차 죽일 수 없었던 것은 조선에게 운이 좋았다. 만약 살해했다면 일본군은 철수를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순신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령관을 잃고 있던 조선은 일본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조선은 홍타이지에 항복해 청국의 속국이 되어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주게 되었다. 즉 일본 대신 청국이 조선 종주국이 된 것이다.
@user-zg4cs4mb5r
@user-zg4cs4mb5r 7 ай бұрын
와 박광일 쌤 ~ 너무 잘 들었습니다. 마치 현장에 …
@parmenideskim9739
@parmenideskim9739 7 ай бұрын
임진왜란에서 부상자를 제외하고 죽은 일본군만 2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임진왜란은 일본에겐 큰 흑역사로 남은 전쟁입니다. 우리나라가 칠천량 해전을 무대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지 않듯이 일본도 임진왜란을 무대로 한 드라마나 영화를 절대로 만들지 않는다고 하네요.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한국인은 무엇이든 날조한다. 일본군은 원래 총수가 15만명이다. 어떻게 하면 20만명 죽는 거야? 그리고 전쟁 후에 조선인 10만명을 데리고 귀국하고 있기 때문에 생존한 일본병이 10만명 이하로는 생각할 수 없다. 즉, 일본군의 사망자는 최대 5만명이다. 그리고 일본군의 사령관은 전혀 죽지 않았다. 이순신 등 대부분의 사령관과 수십만 명의 병사가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조선군과는 이 점이 크게 다르다.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일본군의 사망자는 7년간 5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부분은 아사와 병사이다.
@user-rs8zs6nz3w
@user-rs8zs6nz3w 7 ай бұрын
강디 넘 멋지네요 역시! joy4u에서 방송하던 신입아나운서 시절이 떠오르네요 기침 오래해서 걱정했었는데 잘 회복한 모습도 감사하고요!^^
@tlopsol
@tlopsol 7 ай бұрын
정자세로 보겠읍니다
@user-yx1sy3ks9o
@user-yx1sy3ks9o 7 ай бұрын
작가정신 ~~ 너무 감명깊이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abcdeereijgfhd3215
@abcdeereijgfhd3215 7 ай бұрын
노량의 이순신의 모습은 진짜 맹장의 모습이었지. 왜군 입장에서는 그냥 지옥에서 온 사도나 다름 없지 않았을까?
@user-ej8mn8xs9x
@user-ej8mn8xs9x 7 ай бұрын
이런 뼈아픈 역사가 있고 그기다 일제강점기까지 겪었는데도 과거는 다 제쳐두고 일본이랑 굴종외교하는 자는 제정신인가 싶습니다
@eve5661
@eve5661 7 ай бұрын
저는 님과 싸울려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만, 우리가 왜 일본에게 분통터지는 소위 “굴종외교”를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현국제 정세를 한번 보시면. 북한은 우리나라 앞전정권(누군지)는 잘 아시겠지요? 이 우리나라 국민들의 피같은 세금으로 친북외교를 하면서 북한에게 엄청 갖다가 퍼 주었죠? 그 돈으로 북은 현재 “ 핵무기”를 만들어 버린 상황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북은 예전 정권처럼 현 정권이 북한에게 예전처럼 돈 갖다 바치도록 수시로 미사일을 수시로 쏘아대며 무력시위를 하고 있는게 현실이구요, 근데... 여기서 중요한건, 만약 여기서 우리나라가 일본과 굴종외교를 안하면 북중연합에 대항하기 위한 한미일 연합에 지장이 있다고 초 강대국인 미국이 우리나라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는게 현실인데, 님이 대통령이라면, 미국.일본 다 필요없어, 됐다! 우리힘으로 중국 북한과 피터지게 한번 싸워보자! 이런 결단을 내리시겠습니까? 저도 특정 당을 무작정 지지하진 않는 중간 국민의 한사람으로 현 대통령이 정치경험이 없어서 정신못차리는게 진짜 한심하긴 합니다만, 나라가 힘이 없는건 우리 대한민국 구성원 모두의 책임이지 특정 대통령만의 책임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님도 아시겠지만, 냉혹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힘이 없으면 힘이 있는 쪽에 줄을 서서 존속해야 하는것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렇다고 자유대한 민국이 공산국가인 ”중국+북한“과 손을 잡는다는건 있을수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구요.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한일병합인 36년간 조선인의 인구는 두배로 늘었다. 일본인이 싸우고 있는 동안 조선인은 섹스를 하고 있던 증거이다.
@gyull76
@gyull76 3 ай бұрын
잊을 만 하면 한 번씩 나오는 편집장님의 '박광일의 팔도유람~' 할 때마다 웃으시는 박광일 선생님😊😊😊
@slowgramstudio9796
@slowgramstudio9796 7 ай бұрын
❤대박 프롬프트 없을텐데 장군 이름을 쉼표 없이 말씀하시네요 . 🎉감동과 존경 보내요
@jangmikal
@jangmikal 7 ай бұрын
퇴근길 기대중
@deadslow2146
@deadslow2146 7 ай бұрын
이순신 장군님의 순국 지점은 노량이 아니라 관음포입니다. 노량으로 적을 몰아가던 중 노량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관음포에 이르러 왜적의 총탄을 맞아 돌아가셨음
@user-rx3ws7ep8k
@user-rx3ws7ep8k 7 ай бұрын
맞습니다.남해 관음포
@HotSoil510
@HotSoil510 7 ай бұрын
3월 9일 [양력 4월 6일]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 바 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밥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 바 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 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 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 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 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 맑 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 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 해, 면, 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 한대(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 명과 잤다.
@user-wi2rl3hx4s
@user-wi2rl3hx4s 6 ай бұрын
관음포가 맞죠~~~
@hiroono1
@hiroono1 6 ай бұрын
일본군이 빼앗은 조선의 대포가 보존되고 있지만, 그것을 보면 제조 정밀도가 낮고, 흑연이 새기 때문에 사거리가 길었을 리 없다. 그리고 당시의 포탄은 철의 덩어리이며, 폭발하지 않기 때문에 위력도 없다. 조선군의 가장 유효한 무기는 화살이었다.
@user-yn4jf6sy1b
@user-yn4jf6sy1b 2 ай бұрын
관음포에 순국공원이 조성돼었고 그 안에 이락사 이락파라는 사당이 있습니다. 이순신장군께서 순국하신곳 앞에 .
@Thatisallright25
@Thatisallright25 7 ай бұрын
노량 정말 재밌어요!!!!!!!!!!!!!!!!!!!!!
@user-st2ug2qz1p
@user-st2ug2qz1p 7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좋은내용 메모하게 자막좀 넣어주면 더욱 좋겠네요
@user-bq8jo4pi5v
@user-bq8jo4pi5v 7 ай бұрын
위대한 이순신 장군의 수많은 수식어를 떠나 노량 죽음의바다 너무 재밌습니다
@LeadingWorshiper
@LeadingWorshiper 7 ай бұрын
최애 관심사 감사히 봄. ㅎ 얼마전에 구독했어요 ~🎄✌️
@user-ow5wi6sw2f
@user-ow5wi6sw2f 7 ай бұрын
마지막 전쟁이 아니라 마지막 전투!
@hangledotcom
@hangledotcom 7 ай бұрын
0:52
@1luck_c
@1luck_c 7 ай бұрын
노량은 구노량 신노량 설천노량 3노량이 있어서 신기했어요 내 21살을 보냈던 노량
@frogeman
@frogeman 7 ай бұрын
군인은 대전 이후, 정치인에 의해 토사구팽 당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결과이니....노량에서 돌아가시는 것이 오히려 나았을 것이다. 한신....토사구팽! 선조.....이순신....토사구팽! 뭐, 양두구육 토사구팽 준서기도 있지. 결국, 정치인이 이긴다.
@bright_energy
@bright_energy 7 ай бұрын
안그랬으면 10년 다시 왔을것..덕분에 300년 지연 시킨것
@user-pe8up1id3k
@user-pe8up1id3k 7 ай бұрын
오늘 영화 보고 왔습니다.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 죽음으로 지켜내면 우리에 바다가 엔딩으로 나오더군요! 그 바다에 후꾸시마 핵폐수가 들어오지 않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user-ot3fu6ix1u
@user-ot3fu6ix1u 7 ай бұрын
막타가 중요하다는걸 한민족의 DNA에 알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예로 살수대첩도 철수하는 수군 뒷통수를 뽀개버린것😂
@rytns20
@rytns20 7 ай бұрын
ㅋㅋㅋㅋ 단칼에 짤라버리시는군요. 휘리리릭~은 썬킴샘 하고만 하시는걸로~
@RC-HONG
@RC-HONG 7 ай бұрын
👍
@hangledotcom
@hangledotcom 7 ай бұрын
아빠의 고향이 남해군, 엄마의 고향이 여수시 (이모댁이 진남관 근처)고, 여수에서 태어나 남해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을 이순신과 함께 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으로서 명량은 저에게 운명과도 같은 영화처럼 느껴집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역덕에겐 고향사람인 박광일 쌤이 정말로 자랑스럽습니다.
@user-iq2xr1jl2o
@user-iq2xr1jl2o 7 ай бұрын
정말 죽을 생각으로 싸웠던 피비린내 나는 전투였죠.
@user-yc1wo7pd9k
@user-yc1wo7pd9k 7 ай бұрын
이 영화 개봉 하는것도 오늘 알았는데 박광일선생님 썸네일보고 깝놀했어요
@webtaiying
@webtaiying 7 ай бұрын
엄마좋니 아빠좋니? 둘다 좋아~
@InOS-ex6hb
@InOS-ex6hb Ай бұрын
8:23 히데요시 사후 급변하는 일본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서죠. 조선에 파병을 보내지 않은 큰 세력이 있는데다 히데요시 사후 후계자가 막강하지 않았거든요.
@user-mw2vp9gc7p
@user-mw2vp9gc7p 7 ай бұрын
당연히 뒤를 쳐서 전력을 최대한 분해시키는게 맞지. 또다시 재재란이 없으란 법이 없으니까.
@sangkwonhyun9254
@sangkwonhyun9254 4 ай бұрын
죽을 자리를 찾은거라 봅니다. 살아서 선조에게 수모를 당하느니 후세 역사에서라도 제 평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적을 끝까지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작정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퇴각하는 무수한 적을 끝까지 추적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선조가 자기에게 모욕감과 질투심을 심하게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전쟁이 끝나면 존재가치가 사라진 자신은 어떤 이유로라도 죽임을 당할거라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donahn8816
@donahn8816 7 ай бұрын
개 재밌네
@user-og2eu7cj7t
@user-og2eu7cj7t 7 ай бұрын
삭초제근의 의미가 컷던 노량해전,,,, 전 주말에 영화 보러 갑니다~
@bij4103
@bij4103 7 ай бұрын
어릴때 배운 국수주의 역사에서 진린을 악인화 했었는데... 사실은 명나라 장수중 가장 의인이었음... 전라도에 진린의 후예들이 망명와서 광동 진씨로 살아왔고 지금 약 3000여명의 후손들이 대한민국 사람임... 유명한 사람들도 많음...과거 진의종,진념 부총리 등이 그들임
@hgrayson
@hgrayson 7 ай бұрын
노량 : 죽음의 바다... 오늘 개봉했는데 저는 내일모레 스타필드 하남의 메가박스에서 보러 갈 예정입니다! 확실히 이분은 이순신 장군님과 노량해전에 대해서 팩트를 박아서 설명하고 계시네요. 진린이 확실히 조선 사람들 입장에서는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그래도 이순신 장군님을 믿고 따르는 자가 되었다고 하죠!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다 아는 내용인 이순신 장군님의 죽음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 이번 영화관람에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실제 노량해전에는 거북선이 나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 예고편을 보아하니 거북선이 야간 전투에 나오더라고요. 이건 칠천량 해전인지, 아니면 오류로 인해 노량해전에 거북선이 나와버린 것인지가 궁금합니다.(실제로 칠천량 해전에서 거북선들이 모두 침몰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답변을 남겨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user-zs7eb5uc9r
@user-zs7eb5uc9r 7 ай бұрын
다분히 픽션인거죠. 명량영화에서도 거북선이 잠깐 나오는 것처럼.
@hgrayson
@hgrayson 7 ай бұрын
@@user-zs7eb5uc9r 그럼 노량해전에도 거북선이 오류로 나와버린다는 거네요... 다만 명량에서도 거북선이 허상으로 나오기는 하나, 쿠키영상의 한산도 대첩 장면에서도 잠깐 모습을 비추는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는 후에 나오게 될 한산 : 용의 출현을 암시하고 만든 것이니까요.
@ashijin2002
@ashijin2002 7 ай бұрын
김한민 감독이 픽션으로 거북선을 넣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상징 같은 개념으로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거북선이 준공한 증거는 없고, 일본군과 싸운 기록도 없다. 침몰한 기록도 없고, 잔해도 발견되지 않았다.
@user-im5eu3lj8k
@user-im5eu3lj8k 7 ай бұрын
일본이 임진왜란이후 명치유신 이전까찌 한반도 침공을 시도하지 못한이유가 노량해전의 심각한 트라우마 때문..?
@user-hz6yn6en7d
@user-hz6yn6en7d 7 ай бұрын
토요토미와는 달리 도쿠카와막부는 조선에 우호적이었습니다 도쿠카와막부가 무너지고 메이지유신때 또 조선을 침공하지요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외상은 없다. 조선에는 외상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 병합을 간청했다.
@user-kh3ko1gj5z
@user-kh3ko1gj5z 7 ай бұрын
당연히 노량해전하면 성웅이순신 장군이지만 당시 명나라부총통 등자룡장군을 잊으면 안되죠. 70노구에 첫참전에 진린총통의 보다도 이순신장군의 뜻에 함께하다 수겁을당한 등장군을 잊으면안됨. 그래서 노랴믄 죽음의바다가 아닌 정의와 신의의 바다라해야 함.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일본군의 지휘관은 전원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만약 일본군의 지휘관에 사망자가 나왔다면 일본군은 귀국을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의 희생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런 곳까지 생각이 돌아오지 않는 바보 같은 사령관이었다. 명군은 훨씬 현명했다. 불과 몇 년 후에 청국과 싸웠을 때 일본에 구원을 요구했다. 전쟁이란 외교수단의 하나다. 이순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리석은 사람이다.
@user-un8yn6nq2w
@user-un8yn6nq2w 2 ай бұрын
귀주대첩도 퇴각하던 거란군을 상대한겁니다, 살수대첩도 그렇고요, 대승은 퇴각하는 적을 쫓은 경우에 많이 나옵니다.
@ashijin2002
@ashijin2002 7 ай бұрын
군인정신의 교과서
@dudrak7575
@dudrak7575 7 ай бұрын
량은 좁은 물목, 협수로를 말함. 칠천량은 거제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협수로.. 물길을 말한다면 거제 북단의 좋은 물길을 두고 좁은 협수로로 돌아갈 이유는 없지요! 견내량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협수로
@Badagaese
@Badagaese 7 ай бұрын
이순신 정군의 노량해전은 , 전략적으로 모두를 설명할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선 전략적인 부분만 들여다 보자면 퇴각하는 적을 굳이 추격하여 끝까지 섬멸하려고 하신 이유는 재침을 염려하고 막기 위함이라는 해석에 공감하지 않을수 없네요 , 그리고 또 하나 7년간의 전쟁으로 희생된 백성들의 참혹함에 대한 분노일것임니다 장군은 언제나 계산적으로 이기는 전투를 하셨는데 , 딱 두번 모든 계산을 내려놓고 죽기 살기로 싸운 전투가 명량과 노량해전입니다 , 명량해전은 조선수군의 명운 까지 걸린 절대절명의 전투이고 노량해전 또한 죽음을 불사하는 전투였습니다 , 장군의 전투는 언제나 전략적이라 희생을 최소화 했는데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만큼은 장군과 휘하의 용사들이 대거 전사합니다 , 이런 이유로 정군의 자결설이 지금도 유력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일본군의 지휘관은 전원 무사히 일본으로 귀국했다. 만약 일본군의 지휘관에 사망자가 나왔다면 일본군은 귀국을 중지하고 다시 조선을 공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인의 희생자는 더 늘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그런 곳까지 생각이 돌아오지 않는 바보 같은 사령관이었다. 명군은 훨씬 현명했다. 불과 몇 년 후에 청국과 싸웠을 때 일본에 구원을 요구했다. 전쟁이란 외교수단의 하나다. 이순신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리석은 사람이다.
@moogong
@moogong 7 ай бұрын
명량 이후 부터 해군본진은 고금도 입니다 영화에도 몇번 언급되는데 완도군 고금면
@user-tz7cw7gs2d
@user-tz7cw7gs2d 7 ай бұрын
네 맞아요
@xkh567
@xkh567 7 ай бұрын
이순신 장군이 살아 있었으면 아마 일본에 대한 징벌 차원에서 최소한 대마도 정도는 정벌하자고 주장 했을 겁니다
@단기4357
@단기4357 7 ай бұрын
1.한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에서 명립답부의 청야전술의 좌원대첩 2.고.수전의 영웅 을지문적의 살수대첩 3.강감찬 귀주대첩 4.이순신 노량해전 공통점은 1~3 청야전술 1~4 후퇴하는 대군을 추적하거나 가로막고 최후의 섬멸작전으로 전쟁 재침공 의지를 꺾어버림
@user-kh3ko1gj5z
@user-kh3ko1gj5z 7 ай бұрын
등자룡장군이 부상돼야는데, 영화에서 오히려 왜군 시마즈가 돋보이게한 건 옥에 티라는 아쉬움. 15:09 15:13
@user-db2tu9tt1z
@user-db2tu9tt1z 6 ай бұрын
전쟁(戰爭)과 전투(戰鬪),용어의 차이점
@hdmin08
@hdmin08 7 ай бұрын
순천왜성 유적... 기단이랑 성터밖에 없던데요?
@doj6455
@doj6455 7 ай бұрын
검찰 하나회 나부랭이가 이순신 운운하는게 정말 토나오는 시대다..
@stephanko9829
@stephanko9829 7 ай бұрын
정치병걸리면 고치기 힘든데 ㅠㅠ 모든것이 정치진영논리로 설명하려고 하면 삶이 힘들어저요 ㅠㅠ
@user-gc9ys8qm7z
@user-gc9ys8qm7z 7 ай бұрын
전과자에 선동을 당해도 진보주의자로 착각하는 지적수준 ᆢ
@user-nk8ot8fn1u
@user-nk8ot8fn1u 7 ай бұрын
죄명이가 빨리 정리되야 할텐데요~~
@user-zm8cv6qt4v
@user-zm8cv6qt4v 7 ай бұрын
300년뒤에 다시 조선을 침략하죠 식민지 ~~ 이난영의 노래 목포의눈물 가사에 그당시 상황을 반영하여 ~~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 일제의 검열을 피하기위해서 가사를 바꾸죠~~ 삼백연 원앙풍은 노적봉~~으로
@user-ql3cm5bw3h
@user-ql3cm5bw3h 7 ай бұрын
전쟁이 아니라 전투지요.
@jaehwanan7561
@jaehwanan7561 7 ай бұрын
재침을 막겠다고 출동한건 아무리 이순신장군도 불가능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고니시랑 시마즈를 어떻게 다 막습니까... 노량 전략펼치는걸 보니까 시마즈를 노리고 나온거 같습니다. 고니시는 도망갈거라 생각하셨겠죠.
@user-bk1bl1jd9u
@user-bk1bl1jd9u 7 ай бұрын
노량해전은 고니시구출작전으로본다면 이기고도 이기지 못한 전쟁이 됐다. 고니시 시마즈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성웅을 잃었다는.. 압도적 전승을 거두었지만..
@ashijin2002
@ashijin2002 7 ай бұрын
하지만 전력의 대부분을 잃은 시마즈와 겨우 살아간 고니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일본의 역사를 바꾼 노량해전이죠
@ridicus1457
@ridicus1457 7 ай бұрын
시마즈가 세키카하라에서 살아 도망친 얘기를 보면 노량에서도 비슷했을거에요 즉 시마즈 죽이기는 정말 힘들었을거라는거죠
@hiroono1
@hiroono1 Ай бұрын
일본군은 대부분 귀국했고 지휘관의 사망은 0이었다. 조선군은 지휘관을 포함해 대부분이 죽었다. 배도 침몰했기 때문에 부산에 집결한 일본군을 공격하는 일조차 못했다. 글쎄, 이긴 것은 어느 쪽인가?
@bocsil
@bocsil 7 ай бұрын
전투
@user-hn6vy2vp4j
@user-hn6vy2vp4j 7 ай бұрын
동서로 나뉘어 한일전이 500년째 지속중
@jhtiger1104
@jhtiger1104 7 ай бұрын
중간중간에 전투를 전쟁이라고 표현하시는 부분들은 좀 아쉽네요 전투와 전쟁은 분명 다른 개념인데
@benkim8053
@benkim8053 7 ай бұрын
예전 어느 소설에서 명나라 배가 크고 조선 배는 작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사대주의적 발상이었을 것 같다.
@TV-cm9hc
@TV-cm9hc 7 ай бұрын
#한국판_판타지_히어로 #성웅_이순신 #노량_죽음의_바다 #실관람평 개봉작 노량의 감상평 전에 알아야 할게 있습니다. 엔딩 연출자막도 한참지나서 영상(광해 세자)이 나온 이유가 무엇인지요. 자막나오면 다 나가버리는데.. 누가 볼수있다고 그런 편집을 했는지요. 무슨 숨은뜻이 있는지.. #감상평 명량ㆍ 한산에 이어, 헐리우드에 버금가는 한국판 블록버스터 전투씬이다. 지난 수십년간.. 우리나라의 영화는 우리의 영웅이 수도없이 많음에도 식민사관과 소중국 속국이라는 사대라는 거짓프레임에 갇혀, 광활한 대륙을 호령하던 고조선과 삼국 고려 발해사의 역사가 있음에도, 한동안 중국판 판타지 3류 무협영화 한족의 소설 삼국지 영화에 열광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국뽕이 낫지 않을까 싶다. 이제서야 한류와 더불어 제대로 된 블록버스터 역사물인 세계사에 빛나는 대첩인 명량ㆍ한산 노량해전이 세상에 빛을 보는것 같습니다. 마지막편인 노량- 죽음의 바다는 위대한 세계적영웅 이순신의 영혼이 후세들을 일깨우게 하는.. 헌정 영화로서 대단한 족적을 남긴 명작이다. 근대 역사물인 서울의 봄과함께 2023년을 마감하면서.. 이 두편의 영화가 대한민국이 가일층 세계를 향해 우뚝서서 뻗어나가는데 일조를 할것임을 자부한다.
@zorosz55
@zorosz55 7 ай бұрын
7:03 가토 1차에서패배한적이없습니다. 조명연합군의 고립작전으로 죽기일보직전까지갔으나 다른성에서 구원을와서 살았기때문에 본인도 울산성도 보존했습니다. 사실의오류입니다. 어떻게하면 3개성중에 하나도 함락을 못시키나요. 답답할노릇입니다. 조선군정말약했나봅니다 남해안일대 40여개성을 쌓을동안 저지를 왜 못한것인지
@75umberto20
@75umberto20 7 ай бұрын
여수사람으로서 이순신 장군님의 기가 온전히 남은 곳은 여수죠. 장군님이 타고 다니신 판옥선 누가 만들었죠? 거북선 누가 만들었죠? 7년 전쟁동안 장군님 밑에서 싸웠던 사람들 주력이 어디죠? 여수사람으로서 이순신 장군님 관련해서는 조금도 앙보할 수 없습니다. 😊
@user-rx3ws7ep8k
@user-rx3ws7ep8k 7 ай бұрын
모두의 역사이겠죠
@entn8769
@entn8769 7 ай бұрын
여수보다 고흥사람이 주력이죠.
@user-bz8jn8lx5d
@user-bz8jn8lx5d 7 ай бұрын
시마즈 부대에 관한 설명이 부족하군요. 시마즈 가문의 영지가 나중에 사쯔마라 불리는 현 가고시마현. 이지역 사무라이들이 과거부터 일본 최강의 전투력을 자랑했고 이지역 사무라이들이 나중에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키고 일본 해군의 주역이 되죠. 아베총리의 지역구인 야마구치현이 과거 쵸슈라 불럿습니다. 쵸슈의 사무라이들이 사츠마 사무라이와 협력해서 메이지 유신을 일으켯는데 사츠마 출신들은 육군을 장악합니다.
@teamkevin-
@teamkevin- 7 ай бұрын
당시 상황은 종전, 정전, 휴전도 아니었고, 항복도 아니 화친 운운 하는 상황이었으니, 당연히 전후를 말 할 필요가 없었음. 절대적인 전략으로 찍어 누르고 집요하게 상대 전력을 궤멸 시켜야만 전후처리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건 너무나도 명확한 논리..다만...영화 고지전에서 보았듯이..병사 개개인으로 보자면 처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살아 돌아가야 하는 왜군이나 7년 내내 죽음으로 내몰렸던 조선군이나, 남의 나라 전쟁에 와서 이유도 모르고 싸워야 하는 명군이나...다 싸우기는 싫었겠지만...
@IiiiiiiiiiiiIiiII-iII
@IiiiiiiiiiiiIiiII-iII 7 ай бұрын
조선수군은 두번다시 침략 못하게 맹렬히 쫓았다는 입장이고, 일본군 입장에서는 특히 각 다이묘들은 가문이 위기라서 좀 돌아가고 싶었고. 다시는 조선땅 발붙일 생각도 없었음. 도요토미가 죽었으니 당연히 전국시대 위치로 돌아갈게 자명해서, 철군하는 입장에서는 목숨줄 온전히 돌아가려고 위축되어서 사기충진도 안된상태로 이순신하고 싸워서 엄청 성가셨을듯
@jong_sul
@jong_sul 7 ай бұрын
이순신은 태풍을 이해했고 여름 에서 가을로 지나갈때 ㅎㅎㅎㅎ . 이때가 기회였던거였고 . 우리나라 배는 충파에 ㅎㅎㅎㅎ 이걸 잘 표현했어야 했는데 . 이게 아니면 . 포탄의 사정거리를 아는 이순신이 왜 사정거리에 들어갔는지 이해가 안되 .
@ShePingPing
@ShePingPing 7 ай бұрын
japjisa가 아니라 zapzisa야? z발음이 얼마나 에너지가 많이 드는 발음이라는 걸 알면 z자를 쓰지를 않지.
@jinyou851
@jinyou851 7 ай бұрын
한동훈한테 물어봐라. 국짐이 한동훈이 이순신 같은 사람이라고 하니...
@user-px2ge9sb3z
@user-px2ge9sb3z 7 ай бұрын
임진왜란은 명과 휴전협정으로 전쟁이끝난거죠 .
@user-zp2ph8qw9n
@user-zp2ph8qw9n 7 ай бұрын
아! 다 좋은데.. 전투. 전쟁 구분 좀 잘 합시다! 이건 뭐 아마추어도 아니고
@youngnamsohn9055
@youngnamsohn9055 7 ай бұрын
이순신 장군은 불패의 장군입니다 도망가는 적 놔주면 그만인데 놔 주지 않은 이유 중에 중요한 것을 모르시는 군요 이순신 장군은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승리를 위해 멍청한 왕명도 어긴 사람이고 선조는 자기의 명을 어긴 이순신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순신은 자살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노량이 마지막 전투가 아니었다면 거기서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고의로 전사해 멍청한 왕에게 의리를 지키면서도 한편으로는 항거한 것입니다
@abcdeereijgfhd3215
@abcdeereijgfhd3215 7 ай бұрын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임한거겟죠. 일부러 죽으러 가는 비겁한 이순신의 모습은 상상도 할수 없습니다.
@user-yk8dn3gb8b
@user-yk8dn3gb8b 7 ай бұрын
도망가는 적을 상대하는게 아니라 시마즈와 고니시에게 쌈싸먹히는걸 방지하려고 나간 겁니다. 고니시의 연락선이 사천에 당도하는 순간부터, 어차피 피할수 없는 전쟁이니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준다는 거지요. 퇴각을 하려면 사량도 쪽을 지나서 일본으로 가야 퇴각이죠. 지리공부부터 다시하고 댓글쓰세요
@bcyi3123
@bcyi3123 7 ай бұрын
​@@user-yk8dn3gb8b지리공부는 당신이 해야할듯 모지리양반.. 쌈싸먹히지 않으려고 노량으로 들어가나?
@user-wf4wy7mz5z
@user-wf4wy7mz5z 7 ай бұрын
음모론이지만 정말로 천수누리다 광해군때 죽은게 사실인지 궁금할때 많네요
@user-sm4zk3fp3b
@user-sm4zk3fp3b 7 ай бұрын
지도펴놓고 설명해도 뭔말인지 하나도 못알아듣겠다 지도에서 설명에따라 이미지가 나와야하지않냐?
@user-nk8ri2dy5o
@user-nk8ri2dy5o 7 ай бұрын
존경하는 성웅이순신장군 영화를 이따위쓰레기로만드는 김한민이는 다신 영화찍지마라 안쪽팔리냐??
@MrParkcool017
@MrParkcool017 7 ай бұрын
역사작가라는 분이 단어 선택이 엉망이네요. 노량이 최후의 전쟁이었다? 최후의 전투였습니다. 전투와 전쟁의 개념도 모르고… 오히려 사회자는 최후의 전투라고 정확히 표현. 그리고 회전? 회전은 양측 군대가 어느 지점에 집결하여 전투를 벌이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당시 왜성을 쌓고 ㅈ포위당한 왜군을 공격하려 했던 건 회전의 개념이 아니라 포위전이었는데 회전이라고 표현. 또 유정제독, 마귀 제독? 이분들 평샹 육군으로 지냈던 사람들입니다. 제독은 해군 사령관을 말하는 즉 해군에서 쓰는 직함입니다. 그것도 구분 못하고… 시미즈가 응원을 갔다? 응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역사작가 맞나요..?
@sangwoo2256
@sangwoo2256 7 ай бұрын
노매너아님?
Iron Chin ✅ Isaih made this look too e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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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Sl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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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t The Fake Animal For $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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