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손 ____이분이야말로 풍수설의 창시자 도선(道詵)도 울고 갈 풍수의 대가다. // 후손들이 줄줄이 출세한 후, 자신의 유언을 지키지 않을 것과 그로인해 자신의 묘를 왕에게 빼앗길 것 까지 알고 그 방침까지 준비하여 알려줬으니 그야말로 탄복이 절로 나온다.
@user-wn8px9wn7u4 ай бұрын
이성계서당이전주 에. 있으므로 이석으로비롯하여 전주 이씨도 여간아니오. ㅎㅎㅎㅎ
@user-dg2bk4kn9n2 жыл бұрын
이인손의 묘도 지관이 잡아 졌답니다 재실 다리 연줄등도 지관이 얘기했다는게 정설이라고 합니다
@paulrh2210 ай бұрын
조선실록에는 다른얘기가 나오는데 누구 말이 맞는건지...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후세에서 이렇게 저렇게 갔다 붙이면 누구에게 물어볼수도 없고..이게 바로 한국인의 특징이 되어 버렸네 그려..
@user-nq8od7hw1dАй бұрын
음양동기감응 >>이장이후 이장된 가문은 거의 멸문지화는 면회도 쇠락한 ~~♥️🇰🇷🌄🏞💖
@Tube.jong_hyeok2 жыл бұрын
그래서 후대에 연산군이 등장한거군요
@ldw199610 ай бұрын
왕릉은 도성 100리 안에 조성한다는 규칙이 있어서 태종이 태조가 함흥에 묻어 달라는 유언까지 무시하고 건원릉에 장사 지내서 그후 여러 왕릉들이 생겨서 동구릉이 되었는데 상지관이 멀리 떨어진 여주까지 간것이 말도 안되는 거짓말 영릉이 명당이면 증손자인 폭군 연산군이 태어 났겠는가???
@HLZVX15113 жыл бұрын
누가 세조 아들 아니랄까봐..성깔있네.. 그런데..왕실의 피바람 원인이..세종때문일까?ㅋ 그나저나 김인호 교수님..패션센스 화려하시네요ㅋㅋ
@user-bv2og9st8tАй бұрын
내곡동의 태종의 릉은 무학대사가 잡아준 명당자리인 것이다
@user-nn7tg4oi4t5 ай бұрын
음악소리가 너무 커요!
@hyeonjunkim90862 жыл бұрын
피로써 왕권을 다진 부 옆에 있기 자식으로 께름찍했겠죠
@hahahaha-oz5jw3 жыл бұрын
김인호교수님 인가 ㅋㅋ 저땐풍성하셨군요
@user-rx3ws7ep8k3 жыл бұрын
문종의 단명이 결정적이다. 장남인 문종이 어느 정도만 수명이 연장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도 수양대군도 계유정난도 한명회도 단종애사도 없었다. 무학대사의 말을 안들은 정도전의 고집이 조선을 버렸고 무장으로는 훌륭했던 이성계가 헛된 야욕이 고려를 버렸다.
광주이씨 이인손 님의 묘자리입니다. 워낙의 대명당터라 앞에 개울에 다리를 절대 놓지마라는 유언을 하였지만 묘자리덕분인지 광주이씨는 날로 권세가 높아지다보니 묘에 제사하러갈때마다 그냥 건너는게 불편하여 다리를 놓게 되었고 지나가던 조정의 지관이 이를 보고 건너가 이릉터를 발견합니다. 후에 결국 묘자리를 파네어 옮길수밖에 없었고 관밑에 연을 날려 닿는곳에 뭍어라 라는 글자를 보고 놀라 후손들은 그곳에 다시 이장한것입니다.
@user-wi4tc9oi4f3 жыл бұрын
남의묘까지 훔치는 놈이라니.
@user-hh6kh6xe8c2 жыл бұрын
동서양을 막론하고 옛날 왕이 못하는 것이 있었나요? 새삼스럽게 그정도가지고. 그래도 예종은 그리 나쁜 왕으 아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