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방사 (충북 제천)
3:04
2 ай бұрын
니항사건 순난자비
8:49
6 ай бұрын
Пікірлер
@user-it7ke1ug5n
@user-it7ke1ug5n 24 күн бұрын
왜 독립유공자 후손에많 회택주나 아주 잘몾덴 정책이다
@user-xg1oz8lq6z
@user-xg1oz8lq6z 10 күн бұрын
건국이 없음 유공자가있겠습니까 전 독립유공자 후손인데 광복후에 돌아가셨다고 받은혜택없음
@RoziqSharipov-ry6tm
@RoziqSharipov-ry6tm Ай бұрын
Karesityrydâlybi,minaroʻd❤
@user-jk4qh7rh6l
@user-jk4qh7rh6l 8 ай бұрын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임시정부와 독립군ㆍ광복군이 아니라 대한제국군이 맞습니다.. 임시정부와 독립군ㆍ광복군은 말 그대로 임시일뿐이고 국외에 있었던는 의병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임시정부와 독립군ㆍ광복군 활동을 폄훼하거나 왜곡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만 국내에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고종황제가 건재했으므로 대한제국군이 국군의 뿌리여야 합니다.
@imjin6025
@imjin6025 9 ай бұрын
1921. 3. 1. 고려공산당대회 개최 예정일이었나. 양파의 다툼으로 개최되지 않음(상해파는 치타, 이르쿠츠크파는 이르쿠츠크를 주장) 1921. 3월 중순경 상해파 장도정, 계봉우, 김진 등이 고려공산당대회 장소를 블라가베셴스크로 변경 1921. 3. 15. 일경 아무르주 마자나바, 크라스나야라바 일대에서 상해파 박일리야, 이용, 장도정 등이 전한의병대의회 개최, 전한군사위원회와 사할린특립의용대를 조직 1921. 3월경 상해파는 극동공화국 정부와 교섭하였으나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에이히는 고려군대 군권은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있음을 통보 1921. 3월경 총군부, 국민회군, 홍범도 부대, 군정서군, 이만군, 다반군, 박그리고리 부대 자유시 도착. 만주지방 및 연해주지방 독립군 부대를 중심으로 대한혁명군(대한독립군) 조직됨 1921. 4월경에서 5월경 중국 북경 일대에서 상해임시정부와 대립하던 측에서 독립군부대 통합을 위해 『북경군사통일회의』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1921. 4월경 극동공화국 군부에서 계봉우, 김진, 박애, 이용, 장도정 등 등을 이르쿠츠크로 압송 1921. 4. 14. 일경 이르쿠츠크파는 극동공화국 군부에 임시고려군정의회 조직을 통보 (상해파인 계봉우, 박애, 김진, 이용, 김규면, 이한영, 임상춘, 한형권과 협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 1921. 5. 2. 일경 이르쿠츠크파가 비밀리에 조직한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의 오하묵 일행 자유시 도착 1921. 5. 4. 일경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 제1차 대회 개최하여 5월 17일경 폐회.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이르쿠츠크파의 지도하에) 정식 고려군정의회 조직. 총사령관 까란다리시비리, 의원에 류동열, 최고려 등 임명 1921. 5. 12. 일경 예전 오하묵의 보병 자유대대가 크라스나야라바로부터 원래 주둔지 자유시로 이동 1921. 5. 13. 일경 이르쿠츠크의 합동민족군대 소속 한인부대가 자유시로 이동시작(5월 28일경까지 최종 600여명 이동) 1921. 5. 18. 일경 치타에서 사할린부대로 가던 동림 체포. 상해파가 이르쿠츠크파측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고려군정의회 무력화 시도. 이 무렵 상해임시정부의 지원금인 금은화 약 3만루블 이상이 러시아 관청에 압수됨 1921. 5. 19 일경 까란다리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이르쿠츠크에서 자유시로 출발(독립신문 1922. 2. 27 일자) 1921. 6. 2. 일경 홍범도 부대 일부 마자나바에서 자유시로 이탈 1921. 6. 2. 일경 김홍일 단독으로 자유시 도착 1921. 6. 6. 일경 고려혁명군정의회 총사령관 까란다시비리, 류동열, 최고려 등이 코카서스(혹은 카자키, Казаки) 기병 600여명에서 900여명을 인솔해 자유시 도착. 정식 총사령관 선포 (대한혁명군측은 무장해제 명령에 대체적으로 불복) 1921. 6. 6. 일경 까란다리시비리와 통역사 최고려 등은 자유시 주둔 군인 전부를 모아서 설명 1921. 6. 9. 일경 안무 부대 마자나바 이탈후 자유시 도착. 일부 독립군의 주장에 따르면 안무 장군은 홍범도가 떠나자 수차례 자체 회의를 통해 일단 자유시쪽으로 이동하여 내분과 식량난 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이동하였으며, 이르쿠츠크파를 지지하기 위해서 이동한 것은 아니라고 함. 안무 장군의 이탈로 사할린 의용대도 통합에 대한 압박이 가중됨 1921. 6. 14. 사할린부대 자유시 도착후 수라제프카로 이동. 사실상 고려혁명군정의회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임. 자유시가 한국 독립군들로 뒤덮임. 1921. 6. 15. 까란다리시비리, 오홀라 및 3명 블라가베셴스크를 방문하여 체포되었던 김규면, 한운용, 박원섭, 마시욱, 주영섭, 안태국, 임상춘 등을 조사하고, 금은화 3만루블 이상을 회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까란다리시비리 등은 6월 18일 자유시로 돌아옴 1921. 6. 19일경 자유시에서 장교회의 개최(분대장 이상 간부) (※이 무렵 수라제프카에 주둔한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와 공격을 반대한 합동민족군대 소속 고려인 간부 투옥) 1921. 6. 20일경에도 군회가 있었다.(※독립신문 1922. 2. 27 일자에 따르면 1921. 6. 20.일경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1921. 6. 21. 그리고리예프, 박일리야 등 장교 7인이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를 축출하면 고려군정의회에 복종하겠다는 혈서 제출 1921. 6. 22. 일경(※1921. 6. 20일날 화해가 이루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까란다리시비리, 최고려 등이 독립군 3천여명을 자유시에 집합시켜 전군의 통합을 촉구.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 66쪽에 따르면 최고려가 고려혁명 분열을 막기 위해 분란을 일으킨 자신이 독립군이 쏜 3천발의 총알을 맞고 죽겠다고 하자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였으나, 현장에 있던 독립군들은 최고려나 까란다리시비리가 누군지 조차 제대로 몰랐고, 당시 연설을 하여 화합을 유도한 사람은 홍범도 장군 등이었다고 한다. 홍범도는 과거 의병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며, 갑자기 “김유신 장군이 삼국을 통일하실 적에”라는 연설을 하여 자유시 군관학교 운동장에 모인 독립군들에게 울음 바다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날 다시는 서로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홍범도가 이순신, 사명당, 최무선, 김방경, 이종무, 박제상 등의 유명한 장군 이야기를 안하고 왜 갑자기 김유신 장군 이야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21. 6. 24. 일경 독립군 부대 편제 개편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발생 1921. 6. 25. 까란다리시비리, 류동열 등 수라제프카에서 사할린부대 장교회의 개최 1921. 6. 27. 수라제프카에 주둔중이던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인 그리고리예프 사면서 제출. 27일 자정이후부터 공격 개시 1921. 6. 28. 상오 한밤중부터 시작된 기습으로 수라제프카 일대에서 자유시 사건 발생. (사망 수백여명, 포로 등 천여명 이상)​ 1921년 후반기부터 포로로 잡힌 독립군 다수가 이르크추크 등지로 압송중 사망, 일부는 만주⦁연해주 일대로 탈출, 이동휘⦁만주지방독립군 단체⦁상해임시정부 등의 항의로 결국에는 포로생활을 하던 독립군 대부분 석방됨 1921. 10. 16일경 상해파 측이 러시아 지원 자금의 사용처 등을 보고 1921. 11. 28일 러시아측 기록에 따르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동휘, 홍도, 박진순, 통역사 김아파나시 4명이 레닌과 면담하여 독립군 석방을 탄원. 1921. 11. 월경부터 『워싱턴회의』에 한국 독립 문제 제기하였으나 실패 1921. 12. 9일경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ЦК РКП(б))는 자유시의 포격·총격 사건을 수사할 것을 지시 1921. 12. 18. 일경(혹은 12월 20일경) 슈먀츠키와 바이친스키 형식적인 퇴진 발표 1922. 1월경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의 지도자 레닌, 코민테른 총비서 사파라프(Сафаров),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장 슈먀츠키, 김규식, 여운형, 구오남, 홍범도, 일본대표 센카타야마(片山潜), 중국대표 왕, 인도대표 등의 만남이 있었고, 한국측 통역사는 최고려였음 1922. 4. 22. 일경 코민테른 상임위원회 한국문제위원회가 이르쿠츠크 대회에서 제명된 모든 당원 복권, 박진순·박애·최고려·김규식 퇴진, 두세력의 통합을 위한 3개월의 휴식기간 결정 1925. 1. 20일경 일소기본조약(日蘇基本條約) 체결. 일본이 사할린섬 북부의 삼림·석유·석탄 채굴권 등을 획득하고 일본군 철수
@user-gn3mr7ib4p
@user-gn3mr7ib4p 10 ай бұрын
노래가사
@user-jk4qh7rh6l
@user-jk4qh7rh6l Жыл бұрын
나라를 잃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모였는데 서로 권력을 잡겠다고 싸우다가 자유시참변의 주인공이 된 박일리아...
@imjin6025
@imjin6025 Жыл бұрын
프라예르만이 직접 참가하였던 1920년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1920년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와 연관되어, 친일조선인, 황족, 수상, 장성 등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조작되고 선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베리아 침략과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간도토벌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니항사건. 1920. 3. 12. 일 반자이 기습이 실패하자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한 후 '국가의 수치'라며 대대적으로 미화하였습니다. 또 1920년 니항사건은 당시 조선 서울에서도 친일조선인 등이 중심이 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초혼제를 지낼 만큼 일제의 선전은 대단하였다. 니항사건에서 독립군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속이지 말고, '독립군이 몇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오늘날에서라도 보상과 사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러시아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에는 파르티잔 부대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없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많다고 합니다.
@imjin6025
@imjin6025 Жыл бұрын
1920년 일본의 국회의원 선거와 연관되어, 친일조선인, 황족, 수상, 장성 등이 대규모로 동원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조작되고 선전되었던 1920년 니항사건... 그리고 시베리아 침략과 1920년 연해주 4월 참변, 간도토벌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니항사건. 1920. 3. 12. 일 반자이 기습이 실패하자 광기어린 집단자살을 한 후 '국가의 수치'라며 대대적으로 미화하였다. 또 1920년 니항사건은 당시 조선 서울에서도 친일조선인 등이 중심이 되어 국가적 차원에서 초혼제를 지낼 만큼 일제의 선전은 대단하였다. 니항사건에서 독립군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속이지 말고, '독립군이 몇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 오늘날에서라도 보상과 사죄를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러시아 니항(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에는 파르티잔 부대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없고,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는 사람들의 후손은 많다고 합니다.
@imjin6025
@imjin6025 Жыл бұрын
1920년 니항사건은 러시아, 중국, 일본 역사학계의 견해가 많이 다른 사건입니다. 황국사관 혹은 친일학자들의 허위주장을 걸러서 들어야 합니다. 일제 앞잡이의 주장만을 맞다고......사기치는 자들도 많은 모양입니다.
@imjin6025
@imjin6025 Жыл бұрын
1920년 니항사건(니콜라옙스크 사건) 당시 조선인 독립군들이 사살한 기록을 살펴보면 러시아의 공식적인 자료들에서는 포로 약 1~2명을 처형하였고 오늘날 공개된 일본군측 기록들에서는 이것보다는 약간 많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1920. 3. 12. 일본군의 야습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실제로는 더 많은 적군을 사살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일부 백과사전에서 일본과 친일파들의 터무니 없는 주장을 사실인양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늘날 공개된 러시아와 일본측 기록에는 없는 허황된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