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초기불교 각묵스님 | 부처님은 윤회를 설하지 않았다? | 힌두교 윤회와 불교 윤회의 차이 | 이띠웃따까(Itivuttaka)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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Жыл бұры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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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ікірлер: 116
@user-qw7bv8fc8x
@user-qw7bv8fc8x 3 күн бұрын
고맙습니다
@hhyun2968
@hhyun2968 5 күн бұрын
각묵스님 대림스님 전재성 님 묘원 법사님 일창스님 손혜숙님 범라스님 의 번역 덕분에 금생에 불교를 바르게 알수있게 되었습니다 그분들 게 예를 다하여 삼배를 올립니다
@Buddha2568
@Buddha2568 Ай бұрын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고 12연기를 순관과 역관으로 하나하나 관찰하시면서 " 이 중생이 죽어서 어느 곳에 태어나고, 저 중생이 죽어서 어디에 태어났다" 고 바로 눈앞에 물체를 보듯이 환하게 보았다고 경전에 나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눈앞에서 맛있는 빵을 보듯이 그대로 적나라하게 윤회가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user-zv7hc2tt2c
@user-zv7hc2tt2c Жыл бұрын
각묵스님 감사합니다! 윤회에 대해 확실하게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삼보에 귀의합니다_()_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법사 스님도 법우님 말씀을 보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큰 보람을 느낍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himchage
@himchage Ай бұрын
윤회가 없다고 말하는 일부 승려들은 스승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 등 불교경전에서 부처님이 윤회를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 도대체 윤회가 없다는 일부 승려들은 불경을 어떻게 읽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죽음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윤회 환생이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byounghwa6771
@byounghwa6771 Жыл бұрын
열심히 배우고 공부짓도록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_()_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항상 고맙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vm4zn6pt6v
@user-vm4zn6pt6v Жыл бұрын
각묵스님 감사합니다 _(())_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시청해 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셨네요. 고맙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uv9xz6lp2r
@user-uv9xz6lp2r 2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user-rr4kq2jk7x
@user-rr4kq2jk7x 4 ай бұрын
안녕하세요. '60헤르츠'로 무상과 윤회를 배웠습니다. 한 발자국 나아갔습니다.~ 감사합니다.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위리야 법우님이 촬영해서 보내주신 동영상입니다. 초기불교TV에서 편집과 자막 작업을 하여 공개합니다. 위리야 법우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user-hy8tt8uv6l
@user-hy8tt8uv6l 7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스님 훌륭하십니다 _()_
@Toymarket8
@Toymarket8 Жыл бұрын
요즘 선불교니 뭐니 마음공부니 해서 불교에 대해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나쁜건 아니겠지만 진짜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아니라 중국 조사를 받들고? 있으니까요 지방이자 직장인이라 직접 뵙고 듣기가 어렵네요 나중에 뵐수있길 기대합니다 각묵스님 힘내주세요👍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시청해 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초기불교 공부로 금생에 해탈 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 바라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
@hyunsunkim9893
@hyunsunkim9893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_()_()_()_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항상 고맙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digitalkoreakim4126
@digitalkoreakim4126 Жыл бұрын
잘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고맙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
@user-hw4ks8zd5m
@user-hw4ks8zd5m Жыл бұрын
혼자서 아비담마 읽을 때는 잘 이해가 안 되었고 윤회도 헤깔렸는데 , 스님 강의를 들으니 이제 좀 이해가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그러셨군요. 각묵 스님께서도 법우님 댓글을 보면 기뻐하실 것 같아요. 열심히 공부하셔서 금생에 해탈 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 바라겠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ye1jf6zj8j
@user-ye1jf6zj8j Жыл бұрын
삼보에귀의합니다 합장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훌륭하십니다, 법우님. 댓글이 큰 힘이 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bf3kv4xe7d
@user-bf3kv4xe7d Жыл бұрын
안녕하세요 각묵스님 넘~감사합니다 🙏 초기불교를 접하게되어 행복합니다 진심으로 공부 하겠습니다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반갑습니다, 박혜연 법우님. 이렇게 살가운 댓글까지 남겨 주셨네요. 항상 행복하시고요, 초기불교 공부로 금생에 해탈 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 바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user-hl9pc6li3b
@user-hl9pc6li3b 6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스님
@libertyagent
@libertyagent 19 күн бұрын
맛지마 니까야에 보면 부처님께서 스스로 전생에 크샤트리아 왕이었다-고 말씀하신 대목이 나와요. 또 여러군데서 부처님이 윤회를 말씀하셨죠
@user-ch9ns7jz7v
@user-ch9ns7jz7v Жыл бұрын
인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과 다른 내용이네요. 신기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약은 약사에게 불교는 스님에게. 각자 자기 전문분야가 있기 마련이겠지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user-sc9dl2nq3b
@user-sc9dl2nq3b Жыл бұрын
스님의 법문 한마디 한마디가 진심으로 부처님의 원음을 그대로 전하고 싶은 간절함이 있고 왜곡된 부처님법을 바로 알려주고자 노력하고 계신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항상 감사드립니다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반갑습니다, 한선희 불자님. 각묵 스님의 진심이 잘 전달되었다니 기쁩니다. 시청해 주시고 댓글로 격려까지 해주셔서 고맙고요.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wj1wm2pe8l
@user-wj1wm2pe8l Жыл бұрын
연기와 오온의 가르침을 들을 수 있어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수행하겠습니다 각묵스님 !항상 건강 하십시요 🙏🙏🙏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고맙습니다, 이계숙 법우님.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qf2tf2mg1s
@user-qf2tf2mg1s Жыл бұрын
지금 들어도 이렇게 환희로운데 부처님 당시 눈앞에서 보고 안 분들은 얼마나 환희로웠을지.. 감사합니다..()..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고맙습니다, 김인숙 법우님. 환희로움이 전해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je1ig2le5c
@user-je1ig2le5c Жыл бұрын
매우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각묵스님과 전재성 박사님은 대한민국에서 초기불교를 널리 알리신 거목이십니다. 사두 사두 사~두. 무명의 장애를 뚫고, 갈애의 족쇄를 끊기를.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항상 고맙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pr3lo2ii3j
@user-pr3lo2ii3j Жыл бұрын
ㅁ!34445
@user-sc3jq7iv8z
@user-sc3jq7iv8z 26 күн бұрын
윤회가 있고 없고가 그리중요한가 착하게살고 제멋대로사는게 윤회가 결정하는가 스님의 지상목표는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되는것인데 부처가 됐다는스님 있는가 만공 탄허 성철 이분들 부처됐나
@user-bx7ee5ws4x
@user-bx7ee5ws4x 3 ай бұрын
스님 감사 감사합니다 너무나 명명백백한 붓다 말씀인 윤회가 없다 죽으면 끝이라고 법문하는 법륜 등 스님과 학자가 있습니다 참 어이없어요 그런데 조계종 종단에선 왜 이런 사람 용인 내지 방임하나요?? 그점 도저히 이해 불가... 돈문제에 대하여는 폭력하는 종단이 .. 이런 문젠 돈과 종권과 관련없어 나몰라라???에라이~~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1080p로 설정하시면 자막을 고화질로 시청하실 수 있어요. 구독, 좋아요,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
@imiioi
@imiioi 15 күн бұрын
"주의를 기울이지 말아야 할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으로써, 아직 생겨나지 않은 번뇌들이 생겨나고, 이미 생겨난 번뇌들이 성장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주의를 기울입니다[ayoniso manasikāra]. ‘나는 과거세에 있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없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과거세에 어떻게 지냈을까? 나는 과거세에 무엇이었다가 무엇으로 변한 것일까? 나는 미래세에 있을까? 나는 미래세에 없을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될까? 나는 미래세에 어떻게 지낼까? 나는 미래세에 무엇이 되어 무엇으로 변하게 될까?’ 지금 현재에 대해서도 의심합니다. ‘나는 있는가? 나는 없는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있는가? 이 존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이와 같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주의를 기울이면, 여섯 가지 (삿된) 견해 가운데 하나의 견해가 생겨납니다. ‘나의 자아는 있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나거나, ‘나의 자아는 없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나거나, ‘자아로써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나거나, ‘자아에 의해 무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나거나, ‘무아에 의해 자아를 지각한다.’라는 견해가 실제로 확고하게 생겨납니다. 또는 ‘나의 이 자아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서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체험하는데, 그 나의 자아는 항상하고[nicca] 견고하고[dhuva] 영원하고[sassata] 변하지 않고[avipariṇāma] 영원히 지속할 것이다.’라는 (삿된) 견해가 생겨납니다." - [MN2 Sabbāsava-sutta]
@sunyata4812
@sunyata4812 Ай бұрын
이래서 출가자가 있어야 정법이 유지되나 봅니다. 스님 사칭 법륜이나 재가 교수가 어떻게 윤회를 확신할 것이며 경을 제대로 보겠습니까? 윤회마저 부정하는 자들이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말법에 단비 같은 스님이십니다.
@user-bx7ee5ws4x
@user-bx7ee5ws4x 3 ай бұрын
이중섭 교수 최석호(법륜스님) 윤회없다 죽으면 끝이다 주장합니다
@user-lh9cs2cz8o
@user-lh9cs2cz8o Жыл бұрын
수승한 법문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항상 고맙습니다, 박경우 법우님.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ek3my4fq4c
@user-ek3my4fq4c 10 ай бұрын
마음/ 에고라는 환상이 윤회 합니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읍니다.
@sammaditthika
@sammaditthika Жыл бұрын
우리나라에서 빨리어 초기경전 4부니까야를 완역하신 분은 전재성 박사님과 각묵스님,대림스님 뿐인걸로 압니다. 각묵스님과 대림스님은 표기상 한 분(초기불전연구원)이라고 하겠습니다. 전재성 박사님과 초기불전연구원의 변역 방식은 조금 달라 보입니다. 읽기에 편한 쪽은 전재성 박사님의 번역이고,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리는 쪽은 각묵, 대림스님의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편하게 읽고 싶다면 어느 정도의 의역을 잘 살린 전재성 박사님의 번역이 좋아보이구요, 이해를 해도 본인이 하겠다. 어렵더라도 원문에 충실한 번역본을 보겠다고 한다면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초기불전연구원의 번역본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석서, 복주석서의 각주가 매우 잘 되어 있고, 이해를 해도 제 스스로 하고 싶었기때문입니다. 엄청난 양의 각주는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높은 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주석서 없이 니까야를 접한다는 것은 달빛조차 없는 한 밤중에 눈을 감고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주석서의 역할을 했던 것은 깨달음을 성취한 도반 스님들이었습니다. 아라한과를 성취한 그분들이 도처에 계셨으므로 부처님의 법문과 게송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그분들을 찾아가 설명을 들으면 해결이 되었던 것이지요. 지금은 아라한과를 성취한 장로 장로니들이 우리들 주변에 안계시기때문에 주석서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어떠한 책이든 간에 각주와 참고문헌이 자세하고 잘 표기된 책이 좋은 책입니다.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은 주석서를 기본으로 해서 번역하고 있지요. 그것이 가장 크고 중요한 특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주석서를 존중해서 공부하는 분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처님 원음으로 금생에 해탈 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 바라겠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
@user-jr2ds7qp1q
@user-jr2ds7qp1q Жыл бұрын
저도 12연기의 행이 오온의 행으로 봤는데, 같이 니까야를 공부하는 법우님이 신행(들숨과 날숨)과 구행(위따까와 위짜라)과 심행(상과 수) 등의 세 가지 행이 있다고 알려줘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이때까지 잘못 이해하고 있었더군요. 그래서 니까야 초기경을 찾아보니 4. cūḷavedallasuttaṃ (MN 44-교리문답의 작은 경)과 7. cittasaṃyuttaṃ, 6. dutiyakāmabhūsuttaṃ (SN 41.6-까마부 경2) 둥에서 세 가지 행(行)들이 있다고 나오더군요. 즉 "신행(身行), 구행(口行), 심행(心行)인데, 들숨도 날숨도 신행(身行)이고,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口行)이고, 상(想)과 수(受)가 심행(心行)입니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핵심만 간단히 소개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sādhu, bhante”ti kho citto gahapati ... pe ... uttariṃ pañhaṃ apucchi - “kasmā pana, bhante,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k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k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assāsapassāsā kho, gahapati, kāyikā. ete dhammā kāyappaṭibaddhā, tasmā assāsapassāsā kāyasaṅkhāro. pubbe kho, gahapati, vitakketvā vicāretvā pacchā vācaṃ bhindati, tasmā vitakkavicārā vacīsaṅkhāro. saññā ca vedanā ca cetasikā. ete dhammā cittappaṭibaddhā, tasmā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ti. “감사합니다, 대덕이시여.”라고 찟따 장자는 … 이어지는 질문을 했다. - “대덕이시여, 왜 들숨도 날숨도 신행(身行)이고, 왜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口行)이고, 왜 상(想)과 수(受)가 심행(心行)입니까?”라고. “장자여, 들숨도 날숨도 몸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몸이 의존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들숨도 날숨도 신행(身行)입니다. 장자여, 먼저 위딱까 한 뒤, 위짜라 한 뒤 나중에 말을 터뜨립니다. 그래서 위딱까도 위짜라도 구행(口行)입니다. 상(想)과 수(受)는 심(心)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 법들은 심(心)이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想)과 수(受)가 심행(心行)입니다.” 그런데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서에는 거꾸로 나와 있는데, 물론 각묵스님의 불사를 저는 엄청나게 높이 평가하고 존경합니다만 붓다고사 스님이 부처님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석서에 전적으로 의존하면 오류가 생길 수도 있으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시청해 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몇 가지 자료를 아래 첨부합니다. 공부하시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공부하시다가 의문이 있으면 초기불전연구원 카페(cafe.daum.net/chobul)에 문의하시면 좋겠습니다. 1. 상카라(saṅkhāra, 行)의 의미 『초기불교 이해』 제7장 중에서(127~129쪽) 상카라[行, saṅkhāra]의 네 가지 의미 초기불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인 행(行, saṅkhāra)은 크게 네 가지 의미로 쓰인다. 옛날 중국에서 역경승들이 행(行)으로 옮긴 범어 상카라(saṅkhāra, Sk.saṁskara)는 saṁ(함께)+√kṛ(행하다, to do)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행한다는 의미를 지닌 어근 √kṛ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살려서 중국에서 행(行)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러나 행이라는 한역 단어만을 가지고 초기불전의 다양한 문맥에서 나타나는 상카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 의미는 초기경들에 나타나는 문맥을 통해서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상카라는 크게 다음의 네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첫째,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행개고(諸行皆苦)의 문맥에서 제행(諸行, sabbe saṅkharā)으로 나타나는데 항상 복수로 쓰인다. 이 경우의 제행은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들을 뜻한다. 즉 열반을 제외한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모든 유위법들을 행이라 불렀다. 이 경우에 행은 형성된 것들에 가까운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형성된 것들’로 통일해서 옮기고 있다. 그 외 목숨의 상카라(ayu-saṅkhara), 존재의 상카라(bhava-saṅkhara), 생명의 상카라(jīvita-saṅkhāra) 등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도 ‘형성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둘째, 오온의 네 번째인 행온(行蘊, saṅkhāra-kkhandha)으로 나타나는데, 이 경우에도 예외 없이 복수로 쓰인다. 오온 가운데서 색(色, 물질)은 아비담마의 색법이고 수․상․행(受․想․行)은 아비담마의 심소법(心所法)들이고 식(識)은 아비담마의 심법이다. 그러므로 오온에서의 행은 상좌부 아비담마의 52가지 심소법들 가운데서 느낌[受]과 인식[想]을 제외한 나머지 50가지 심소법들 모두를 뜻하는데, 감각접촉, 의도, 주의, 집중, 의욕과 유익한[善] 심리현상들 모두와 해로운[不善] 심리현상들 모두를 포함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경우의 행은 ‘심리현상들’로, 행온(行蘊)은 ‘심리현상들의 무더기’로 옮기고 있다.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난다. 12연기에서의 행도 항상 복수로 쓰이는데,『청정도론』에서 ‘공덕이 되는 행위,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 흔들림 없는 행위’로 설명이 되듯이 이 경우의 행은 ‘업지음들’ 혹은 ‘의도적 행위들’로 해석된다. 이 경우의 행은 업(karma)과 동의어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kamma-formations(업형성들)로 이해하고 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업]형성들]’ 또는 ‘의도적 행위들’로 옮긴다. (주해1: “‘공덕이 되는 행위(puñña-abhisaṅkhāra)’는 보시, 지계 등으로 생긴 여덟 가지 욕계의 유익한 의도(cetanā), 수행으로 생긴 다섯 가지 색계의 유익한 의도 등 13가지 의도이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위(apuñña-abhisaṅkhāra)’는 살생 등으로 생긴 12가지 해로운 의도이다. ‘흔들림 없는 행위(āneñja-abhisaṅkhāra)’는 수행으로 생긴 네 가지 무색계의 유익한 의도이다.”(청정도론 XVII.60)) 넷째, 몸[身]과 말[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kāya-saṅkhāra)·구행(口行, vacī-saṅkhāra)·의행(意行, mano-saṅkhāra)으로 나타난다. 『상윳따 니까야』 제2권「부미자 경」(S12:25) §§8∼10과 『앙굿따라 니까야』 「상세하게 경」(A4:232 §3) 등에서 보듯이 이때의 행은 의도적 행위이다. 그리고『청정도론』에서는 이 삼행도 12연기의 행처럼 업형성 즉 의도적 행위로 이해한다.(『청정도론』 XVII.61 참조) 그래서 신행․구행․의행은 각각 신업․구업․의업의 삼업(三業)과 동의어가 된다. 그런데 이 신․구․의 삼행은 상황에 따라 ‘작용’으로 이해해야 하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몸의 상카라(신행)를 들숨날숨으로, 말의 상카라(구행)를 일으킨 생각[尋, vitakka]과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로, 마음의 상카라(의행)를 느낌과 인식으로 설명하는 경이 몇 군데 있다.(주해2: 『상윳따 니까야』 제4권 「까마부 경」2(S41:6) §3 이하를 참조할 것.) 이 경우에 상카라는 ‘작용’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본다. 들숨날숨이나 생각과 고찰이나 느낌과 인식은 결코 의도적 행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행(상카라)은 그 용처에 따라서 그 의미를 각각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든 행을 아비달마에서는 ‘찰나적 존재’라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아비달마 구사론』 제2권 593쪽 참조) 법과 찰나에 대해서는 본서 222쪽 이하, 특히 223~224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상카라(saṅkhāra)에다 접두어 abhi-를 붙인 아비상카라(abhi-saṅkhāra)가 나타나는데 이 경우는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 특히『청정도론』과 주석서 문헌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의도적 행위를 뜻한다고 여겨진다.(주해3: 『상윳따 니까야』 제2권 「부미자 경」(S12:25) §8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래서『상윳따 니까야』에서 저자는 아비상카라를 ‘업형성’이나 ‘의도적 행위’로 옮기고 있다. 2. 초기불전연구원 번역 문장 「교리문답의 짧은 경」(M44) 중에서 14. “스님, 무엇이 몸의 작용이고, 무엇이 말의 작용이고, 무엇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이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말의 작용이고, 인식[想]과 느낌[受]이 마음의 작용입니다.” 15. “스님, 무슨 이유로 들숨과 날숨이 몸의 작용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이고, 인식과 느낌이 마음의 작용입니까?” “도반 위사카여, 들숨과 날숨은 몸에 속하며 이 법들은 몸에 계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들숨과 날숨은 몸의 작용입니다. 도반 위사카여, 먼저 생각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고찰하고 나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이 말의 작용입니다. 인식과 느낌은 마음부수[心所]입니다. 이 법들은 마음에 계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식과 느낌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관련 주석은 내용이 너무 많아 생략합니다. 꼭 주석을 읽으면서 공부하시기 바라겠습니다.) 3. 기타 각묵 스님께서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분들에게 권하는 책이 세 가지 있습니다. ① 『초기불교 이해』 ② 『아비담마 길라잡이』 ③ 『청정도론』 이 책들을 먼저 공부하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뿌리 있는 불교, 근거 있는 가르침’ 각묵 스님께서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공부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불자들은 승가에 의지해서 가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붓다고사 스님도 틀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을 판정할 수 있는 것은 승가밖에 없습니다. 승가의 견해, 그것이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입니다. 초기불교 공부로 금생에 해탈 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 바라겠습니다. ()()()
@user-jr2ds7qp1q
@user-jr2ds7qp1q Жыл бұрын
@@tipitaka1 부처님 당시의 상가(승가)에는 아라한이 많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법하게 실천수행하는 스님들의 집단인 상가를 의지처로 말씀하시는 것이죠. 과연 지금의 현실에서 예류자를 선언한 스님들이 계시는지, 그리고 삿된 견해를 갖고 있는 스님도 있는데 재가불자들은 어떻게 제대로 상가를 구별할 수 있을지, 정말 그러려면 청련 같고 홍련 같고 보석 같은 불자가 되어야겠죠.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123carth
@123carth Жыл бұрын
영상에서 스님이 스스로 공부를 못해서 이 모양 이 꼴이라고 하시지만 스님 연세로 보면 70년대 학번인데 이 때의 부산대는 현재의 서강대급이죠(특정 학과 한정으로는 연고대급) 공부를 못했을 수가 없죠 공부를 못했으면 애초에 유학도 경전 번역도 불가능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말씀하시니까 저도 한두 마디 덧붙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각묵 스님께서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다고 하지요. 그때까지는 공부를 잘했다고 각묵 스님 스스로 말씀하시고요. 그때 어머님께서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우리 시대에 빠알리 삼장을 번역하시는 스님을 만나게 된 것은 한국 불자의 큰 행운이지요. 모두 각묵 스님께서 출가를 하셨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겠고요.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강일중 불자님. ()()()
@leesa2700
@leesa2700 Жыл бұрын
죽어서 우리 오온은 어떤 물질로 있다가 새몸을 받나요? 빛인가요?
@user-ux9qp8bg1m
@user-ux9qp8bg1m 9 ай бұрын
에너지요ㆍ의식의(아뢰아식에 저장된 프로그램을 함유한)상태로요 무의식이 좀더 정확하겠네요 무의식의 아뢰아식에 저장된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의식 말이죠 더 궁금 한거 있으면 또 물어보세요 아라한법사 이 승민
@leesa2700
@leesa2700 9 ай бұрын
@@user-ux9qp8bg1m 에너지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가나요?
@user-ux9qp8bg1m
@user-ux9qp8bg1m 9 ай бұрын
@@leesa2700 네ㆍ 맞아요 하지만 아뢰아식에 저장되 있던 에너지가 엄마뱃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태아가 즉 새로운 오온이 만들어 지는게 아니라 아뢰아식에 저장되 업의 종자가 에너지 형태로 사바세계의 공간에 머물다가 그 업의 종자 살아생전의 행위의 과보에 따른 업식에 맞는 인과응보로 인해 그연이 맞는 남자의 정자와 그 연이 맞아떨어지는 여자의 난자가 결합될때에 에너지 형태로 떠돌던 아뢰아식의 업식에 의한 종자 에너지가 재생연결식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 수정란과 결합되어 마음즉 의식과 육체를 형성하게 되는 수정란이 형성되어 새로운 오온을 받게 되는것이오나 오온 색 수 상 행 식 중에서 식만이 변하지않고 재생이 되는것이지요 더 궁금한것이 있으면 또 질문하세요 010-6253-9693 아라한 법사 이승민 Ps:저는 브라흐만(네이버 검색요망) 이라는 신과 마음속 또렷한 음성으로 하루18시간 이상씩 대화를 하고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저 아라한성자의 의견도 위의 답변과 거의 같지만 이 범천왕(브라흐만 신과 같은존재)의 의견과 지혜를 같이 빌러서 답변해 드리는 것입니다
@user-lb1bi2nz9g
@user-lb1bi2nz9g 8 ай бұрын
'부처'라는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 발언이 이미 진리라는 단정 하에서 연역을 하는 태도일 뿐입니다. 아트만이든 오온의 흐름 재생이든 입증 불가능한, 인간의 판별 한계인 '실존의 벽' 너머의 사태를 이야기하는 신비주의적 접근인데, 불교의 특징은 그 안개속 논리의 블랙홀로 들어가기전 나름 인식론적으로 심화된 분석태도를 보임으로서 떡밥(?) 미끼 낚시를 해 왔다는 점이 색다른 점이 되겠습니다. 2,500년전 인도 할아버지도 모르는 것을 에포케(판단보류) 하지않고 떠드는 것아 아닐까 의심되지만, 그 또한 판단 불가능한 영역이니 그냥 에포케 하고, 믿고 안 믿고는 애초에 취향적 신앙의 영역. 고기토.
@user-yv7ko8sd1c
@user-yv7ko8sd1c 4 ай бұрын
그리고 우리는 생이 어떻게 고통만 있는건가요. 인간으로 태어나는건 고통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래서 누구는 그래요 부처님이 되는거보다 보살이 되어야 한다. 보살을 중생들이 목표로 해야한다. 모두가 청정해서 보살이 될때 그거이 다 부처가되는길이다. 이게 정말 훌륭한 이치이고 지금 불교가 가야할길이 같습니다. 오온이 개공도 일체고액이라 이건 부처님의 진리를 말할때 쓰는 말이고 우리는 중생이라 이 사바세계에서 모두가 청정함이 이루어질때 중생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라는 이치..... 그렇지요. 중생들의 고통을 나두고 깨달았다고 하고 자기만 열반에 들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나요. 어떻게 본인만 깨달아서 열반에 들고 오온이 개공도 일체고액이면 남아있는 중생들은 뭐요. 이치가 안맞아요.
@Dhammadasa.
@Dhammadasa. 10 ай бұрын
사두 사두 사두🙏🙏🙏⚘ 고귀한 법문 감사합니다.⚘
@user-jr2ds7qp1q
@user-jr2ds7qp1q Жыл бұрын
그리고 이번 생에 아라한을 성취하면 다음 생을 받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드는데, 그럼 전생과 금생 밖에 없어서 삼세라고 보면 안되지 않나요?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시청해 주시고 댓글도 남겨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질문이 있으시면 초기불전연구원 다음 카페(cafe.daum.net/chobul)에 문의를 주시면 좋겠습니다. 초기불교 공부로 금생에 해탈 열반의 튼튼한 토대를 만드시기 바라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
@user-kp9cb6bb2m
@user-kp9cb6bb2m 4 ай бұрын
수다원과만 가도 아견과 아소가 없어진다고 하지요....
@user-ek3my4fq4c
@user-ek3my4fq4c 10 ай бұрын
😅😅
@Visalems
@Visalems Жыл бұрын
그 교수 누군지 귀 간지럽겠다. ㅋㅋ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시청해 주시고 댓글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user-bz8qt8gz8q
@user-bz8qt8gz8q 3 ай бұрын
삼보에 귀의하옵고 _()_ , 각묵스님. 나라는 존재, 삶의 고통... 이런 마음을 가진 모든 분들 중에, 아무리 타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온게 시초고 죽으면 끝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태어나기 전이 분명 있고 죽고 난 이후가 분명 있을것이라.. 그렇게 모두가 분명히 느끼고, 혹은 믿고 삽니다. 그걸 굳이 이름 붙이자면 삼세양중인과에 갇혀사는 인생이라고 하면 될까요? 부처님은 그걸 부정하신바가 없습니다. 세상에 현인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부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부처님이 그 이름, 고작 그 이름, 그 삼세양중인과인지 뭔지하는 그 이름을 인정하고 그걸 믿으라고 하셨습니까? 불자 중에 혹은 삼세양중인과를 비판할지라도, 삼세가 있냐 없냐, 윤회가 있냐 없냐를 두고 다투는 어리석음이 과연 있을까요? 각묵스님 바깥에 그런 어리석음이 있습니까? 각문스님에게 그런 어리석음이 있습니까? 삼세양중인과가 됐든 윤회가 됐든, 고요히 집중해서, 있다 없다는 망상에서 벗어나면, 그런 이름,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참된 우리의 본성이라는 것을, 부처님은 그걸... 그 고된 몸을 이끄시고서는 가르치셨습니다. 바루 걸식하시면서요. 오늘도 계를 지키며, 일체 중생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해탈하시는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와,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_()_ 삼배 올립니다.
@user-jr2ds7qp1q
@user-jr2ds7qp1q Жыл бұрын
맛지마 니까야 12. mahāsīhanāda 2. 사생(四生)과 갈곳[오도(五道)와 해탈] 152. “catasso kho imā, sāriputta, yoniyo. katamā catasso? aṇḍajā yoni, jalābujā yoni, saṃsedajā yoni, opapātikā yoni. katamā ca, sāriputta, aṇḍajā yoni? ye kho te, sāriputta, sattā aṇḍakosaṃ abhinibbhijja jāyanti - ayaṃ vuccati, sāriputta, aṇḍajā yoni. katamā ca, sāriputta, jalābujā yoni? ye kho te, sāriputta, sattā vatthikosaṃ abhinibbhijja jāyanti - ayaṃ vuccati, sāriputta, jalābujā yoni. katamā ca, sāriputta, saṃsedajā yoni? ye kho te, sāriputta, sattā pūtimacche vā jāyanti pūtikuṇape vā pūtikummāse vā candanikāye vā oḷigalle vā jāyanti - ayaṃ vuccati, sāriputta, saṃsedajā yoni. katamā ca, sāriputta, opapātikā yoni? devā, nerayikā, ekacce ca manussā, ekacce ca vinipātikā - ayaṃ vuccati, sāriputta, opapātikā yoni. imā kho, sāriputta, catasso yoniyo. 사리뿟따여, 이런 네 가지 태어남[존재의 영역]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이다. 사리뿟따여, 무엇이 난생인가? 사리뿟따여, 생명체가 그 껍질을 깨고 태어나면, 사리뿟따여, 이것이 난생이라고 불린다. 사리뿟따여, 무엇이 태생인가? 사리뿟따여, 생명체가 태의 막을 벗고 태어나면, 사리뿟따여, 이것이 태생이라고 불린다. 사리뿟따여, 무엇이 습생인가? 사리뿟따여, 생명체가 썩은 물고기, 부패한 시체, 부패한 굳은 우유에서나 물웅덩이나 연못에서 태어나면, 사리뿟따여, 이것이 습생이라고 불린다. 사리뿟따여, 무엇이 화생인가? 사리뿟따여, 천인(天人)들이나 지옥에 태어난 자들이나 어떤 인간들이나 죽은 뒤에 벌을 받아야 하는 어떤 존재들, 사리뿟따여, 이것이 화생이라고 불린다. 사리뿟따여, 이런 네 가지 태어남[존재의 영역]이 있다. “yo kho maṃ, sāriputta, evaṃ jānantaṃ evaṃ passantaṃ evaṃ vadeyya - ‘natthi samaṇassa gotamassa uttarimanussadhammā alamariyañāṇadassanaviseso, takkapariyāhataṃ samaṇo gotamo dhammaṃ deseti vīmaṃsānucaritaṃ sayaṃpaṭibhānan’ti, taṃ, sāriputta, vācaṃ appahāya taṃ cittaṃ appahāya taṃ diṭṭhiṃ appaṭinissajjitvā yathāb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 seyyathāpi, sāriputta, bhikkhu sīlasampanno samādhisampanno paññāsampanno diṭṭheva dhamme aññaṃ ārādheyya, evaṃ sampadamidaṃ, sāriputta, vadāmi. taṃ vācaṃ appahāya taṃ cittaṃ appahāya taṃ diṭṭhiṃ appaṭinissajjitvā yathāb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 어떤 사람이, 사리뿟따여,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나에게 ‘사문 고따마에게는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知)와 견(見)이 없다. 사문 고따마는 딱까를 두드리고 관찰을 동반하여 자신이 이해한 법을 설한다. 그는 어떤 목적을 위해 설해진 법을 실천하는 자를 바르게 괴로움의 부서짐으로 이끈다.’ 라고 말한다면, 사리뿟따여, 그 말을 버리지 않고, 그 심(心)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포기하지 않으면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 예를 들면, 사리뿟따여, 계(戒)를 갖추고, 삼매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 비구는 지금여기에서 무위(無爲)의 앎을 얻을 것이다. 이처럼, 사리뿟따여, 이런 성취를 나는 말한다. 그 말을 버리지 않고, 그 심(心)을 버리지 않고, 그 견해를 포기하지 않으면 운반되듯 지옥에 놓인다. 153. “pañca kho imā, sāriputta, gatiyo. katamā pañca? nirayo, tiracchānayoni, pettivisayo, manussā, devā. nirayañcāhaṃ, sāriputta, pajānāmi, nirayagāmiñca maggaṃ, nirayagāminiñca paṭipadaṃ; yathā paṭipanno ca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apāyaṃ duggatiṃ vinipātaṃ nirayaṃ upapajjati tañca pajānāmi. tiracchānayoniñcāhaṃ, sāriputta, pajānāmi, tiracchānayonigāmiñca maggaṃ, tiracchānayonigāminiñca paṭipadaṃ; yathā paṭipanno ca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tiracchānayoniṃ upapajjati tañca pajānāmi. pettivisayaṃ cāhaṃ, sāriputta, pajānāmi, pettivisayagāmiñca maggaṃ, pettivisayagāminiñca paṭipadaṃ; yathā paṭipanno ca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pettivisayaṃ upapajjati tañca pajānāmi. manusse cāhaṃ, sāriputta, pajānāmi, manussalokagāmiñca maggaṃ, manussalokagāminiñca paṭipadaṃ; yathā paṭipanno ca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manussesu upapajjati tañca pajānāmi. deve cāhaṃ, sāriputta, pajānāmi, devalokagāmiñca maggaṃ, devalokagāminiñca paṭipadaṃ; yathā paṭipanno ca kāyassa bhedā paraṃ maraṇā sugatiṃ saggaṃ lokaṃ upapajjati tañca pajānāmi. nibbānañcāhaṃ, sāriputta, pajānāmi, nibbānagāmiñca maggaṃ, nibbānagāminiñca paṭipadaṃ; yathā paṭipanno ca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ati tañca pajānāmi. 사리뿟따여, 이런 다섯 가지의 갈 곳이 있다. 어떤 다섯 가지인가? 지옥(地獄), 축생(畜生), 아귀(餓鬼), 인간(人間), 천상(天上)이다. 사리뿟따여, 나는 지옥과 지옥으로 이끄는 길, 지옥으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며, 그 실천을 따라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상실과 비탄의 상태, 비참한 존재, 벌 받는 상태, 지옥에 태어난다는 것을 꿰뚫어 안다. 또한, 사리뿟따여, 나는 축생과 축생으로 이끄는 길, 축생으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며, 그 실천을 따라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짐승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꿰뚫어 안다. 또한, 사리뿟따여, 나는 아귀와 아귀로 이끄는 길, 아귀로 이끄는 실천을 알며, 그 실천을 따라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아귀로 태어난다는 것을 꿰뚫어 안다. 또한, 사리뿟따여, 나는 인간과 인간으로 이끄는 길, 인간으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며, 그 실천을 따라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꿰뚫어 안다. 또한, 사리뿟따여, 나는 천상과 천상으로 이끄는 길, 천상으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며, 그 실천을 따라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천상에 태어난다는 것을 꿰뚫어 안다. 그리고 사리뿟따여, 나는 열반과 열반으로 이끄는 길, 열반으로 이끄는 실천을 꿰뚫어 알며, 그 실천을 따라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는 것을 꿰뚫어 안다. ...이하 생략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
@user-yv7ko8sd1c
@user-yv7ko8sd1c 4 ай бұрын
내 맞습니다.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축복을받기 위해서 제사를 해야하는게 맞는거 같습니다~~~오온이 개공도 일체고액이라는 말은 무아고 무상이면 제사를 지낼필요가 없지만..우리는 중생이라서 윤회를 하는것이고 이렇게 제사를 지내고 중생들이 모두가 청정해지는 세상이 올때 그때 비로서 중생들은 윤회를 멈추고 오온이 개공도 일체고액 깊은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갈것이라고 보는것이 이치에 맞습니다. 지금은 감히 그경지에 들어갈수 없어요.아무리 수행한다고 해도 이렇게 어지러운세상에서 어떻고 고요한 마음을 가질수 있겠어요. 라고 말하자 문수보살 사리보살 보현보살 아라한 수제자들이 모두 절하고 깊은 깨달음을 얻고 황개 대조사께서 이를 경전에 쓰고자 하니 부처님이 그렇게 하라하고 받아들이고 크게 기뻐하셨다.
@user-hg8jr1db1t
@user-hg8jr1db1t 4 ай бұрын
스님 말씀 잘들었습니다. 그런데 다 듣고 나니 드는 생각은 윤회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가 아직 부족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저도 스님의 말씀처럼 오온이 찰나생찰나멸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합니다만, 전기불이나 볼펜의 예시처럼 우리는 오온이 찰나생찰나멸 하면서 생존해있는 존재인데, 민약 우리가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에 이른다면 결국 윤회가 끊어진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찰나생찰나멸의 작용이 멈춘다는 말이 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죽지 않고 열반에 이르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처음으로 들고, 두번째는 우리 범부중생이 보통 이야기하는 윤회는 찰나생찰나멸의 윤회가 아니라 전생 현생 내생으로 표현되는 '삶'의 윤회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스님의 말씀으로 이 삼계윤회를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지 이 부분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_()_
@gleekiju
@gleekiju 11 ай бұрын
스님, 질문이 있습니다. 부처님 초기 경전 중에(제가 불교 신자는 아니고 BBS의 애니매에션 부처님 경전을 열심히 듣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사촌이 부처님을 죽이려하자 부처님의 제자들이 걱정할 때, 부처님께서 그와 부처님의 전생인연을 예를 들면서 그가 나를 해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씀하셨고, 또 아끼던 제자가 신통술로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끝내 죽게되었을 때 그 제자가 전생의 악업으로 인해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던 일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합니다. 이 두 가지 설법은 모두 재탄생이 아닌 재육화의 예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설법은 후대의 제자들이 부처님의 이야기를 힌두교적 신화로 구성한 것인가요? 아니면 진실로 부처님께서 재육화를 이야기하신 것인가요? 초기경전이면 후기에 작성된 경전에 비해 그래도 부처님 말씀에 근접하다고 생각하는데 왜 이런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것인가요? 저는 윤회를 "어리석음에 갇혀 쳇바퀴 돌 듯 실수, 후회를 반복하여 스스로 고통받음을 연속하는 상태" 라고 생각합니다. 그 의미에서 스님께서 말씀하신 찰나의 연속성, 오온의 흐름이라는 정의에 공감을 합니다. 그런데 @31:37에 "그것으로 보면 한 생에 죽었다가 다음 생에 재생연결식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다시 마음이 일어나는 것,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라는 말씀에서 "다시 마음이 일어난 것"? 다시 일어나면 전에도 있었고 지금 그것이 난다는 이야기인데 죽기 전 생에 있고 다시 난 생에 이어져 연속으로 존재한다는 말씀과 아트만이 지속한다는 이야기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지요? 여기서 이야기 하는 한 생이 찰나만을 이야기하시는 것인지요?
@user-ef9np7dh5u
@user-ef9np7dh5u 11 ай бұрын
먼저 아트만은 불변하는 겁니다. 불변하는 것이 어떻게 찰나생 찰나멸 하겠습니까? 아트만은 무지한 종교에서 만들어낸 허위개념입니다. 그래서 제법무아. 물질도 정신도 오온도 찰나생찰나멸합니다.
@user-ig8wl2hs8r
@user-ig8wl2hs8r 26 күн бұрын
윤회는 존재하나,,그것을 대하는 힌두와 부처님의 관점에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힌두는 실체론적 입장이요 부처님은 무아 연기적 통찰로 윤회를 상견이나 향봉식 단견을. 경계하시고 중도실상으로 설파 하신것 이라고. 봅니다❤ 향봉? 교학적 바탕도 없는 제나름 체험을 가지고 멋대로 단견을 퍼뜨리고 다니는 스님 자격도 의심스러운 사람 입니다_()_
@user-mb6cy2qx7y
@user-mb6cy2qx7y 2 ай бұрын
무상고무아관을 한다면 윤회가 있다고 말하지 못할 겁니다. 기억도 업식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고 나의 실체도 아닙니다. 죽으면 끝이다라고 하는 것도 맞지는 않지요. 죽었다고 모두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죽어서 아무것도 없어지는 거라면, 살아서는 뭐가 있다는 건가요? 기억이 업식이 다른 생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다. 그 다른 생이 기억을, 업식을 나의 전생이라고 착각한다면 윤회가 있다고 오해를 하겠지요. 개체는 "나"라고 할 만한 게 아니다, 없다라고 하시느데도, 자꾸만 개체를 나라고 여기니까, 착각오해를 하게되는 거지요.
@user-yv7ko8sd1c
@user-yv7ko8sd1c Ай бұрын
죽어도 보는 성품 느끼는 성품까지 사라지는게 아니라 다 남아있으니 그게 여래장이라는거요..
@user-fd1ei7ni6t
@user-fd1ei7ni6t 10 ай бұрын
😂 각묵스님 淸安하십니까. 半世紀를 法門 들어왔는데 스님의 法門이 最高이며 善智識이며 큰 스님입니다. 南 無 阿 彌 陀 佛❤
@digitalkoreakim4126
@digitalkoreakim4126 Жыл бұрын
법화경에...다른분들 욕하지말고 차분하게 말씀 하시면 좋다고하네요.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시청해 주시고 댓글까지 남겨주셨네요. 고맙습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tva2624
@tva2624 Жыл бұрын
스님 강의를 자신이 한번 들어보시고 앞의 언어해석과 뒤의 해석이 이어지는지 보세요 오온의 찰라의 재생상속되어 윤회를 한다? 물질은 상속 대상이 아닙니다 오온 가운데 수는 감정을 나타내는 물질이외의 것이며 이를 품성 불성 진아 자성 각이라고 표현하고 업의 대상적이라고 보지않습니까? 윤회를 부정하는 발언속에 윤회를 인정하는 모순된것입니다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시청해 주시고 의견 남겨주셨네요. 각묵 스님께서는 여기에 답글을 남기신 적이 없으십니다. 스님의 답을 기대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채널 관리자 소임자로서 몇 마디 원칙적인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여기는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곳입니다. ‘뿌리 있는 불교, 근거 있는 가르침’을 좋아합니다.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 같은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윤회를 이해하려면 ‘찰나와 상속(흐름)’ 또는 ‘찰나생 찰나멸의 흐름(상속)’이라는 기본 의미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① (개념을 법으로) 해체해서 보기 ② 무상·고·무아의 통찰 ③ 염오(강한 위빳사나) ④ 탐욕의 빛바램(이욕. 도) ⑤ 해탈(과) ⑥ 구경해탈지(아라한과의 반조의 지혜)’라는 구조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첫째, 그것이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이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실제 관찰해 보면 존재의 실상이 그러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관찰해 보면 물질도 ‘찰나생 찰나멸하며 흘러가고’ 정신이라는 느낌도 인식도 심리현상들도 마음도 ‘찰나생 찰나멸 하며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치 않는 느낌, 변치 않는 인식, 변치 않는 마음 등은 관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우님께서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는데(물질은 상속 대상이 아니다, 수는 감정을 나타내는 물질 이외의 것이며 이를 품성 불성 진아 자성 각이라고 표현하고 업의 대상적이라고 본다 등), 우선 법우님이 주장하시는 내용이 어떤 것에 근거를 한 것인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빠알리 삼장과 주석서’라는 초기불교의 근거에서 그런 주장을 찾아보십시오. 거기에서 근거를 찾기 어려우면 다음으로 대승불교 경전에서 근거를 찾아보십시오. 어느 대승불교 경전에 그런 내용이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주장을 어디에 드러내려고 하면 우선 ‘이것은 ㅇㅇ경에 있는 말씀이다.’라고 먼저 근거를 확실히 하시고 주장을 전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 관찰해 보니, ‘물질은 상속이 되지 않는다.’와 같은 내 주장이 그대로 관찰되며 역시 내가 맞더라와 같이 논리를 전개해 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어떤 논의를 하려면 기초적인 지식은 있어야 합니다. 초기불교에 대해 어떤 의문을 제기하려면 기초적인 이해는 한 다음에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왜 윤회를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매 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 자체가 윤회이다. 생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 생에서의 마지막 마음(죽음의 마음, 死心, cūti-citta)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 paṭisandhi-viññāṇa)이 일어나는 것이 윤회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고 있는지 우선 이해를 해보시기 바라겠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오온’, ‘찰나’, ‘상속’이라는 말을 우선 이해해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오온의 찰나 생멸’ ‘오온의 찰나생 찰나멸의 흐름(상속)’을 이해해야 하며, 나아가 윤회의 구조(12연기 등)를 이해해야 하겠지요. 불교 교학은 촘촘히 연계되어 있어서 어느 하나가 뒤틀리면 다 뒤틀리게 되어 있습니다. ‘① (개념을 법으로) 해체해서 보기 ② 무상·고·무아의 통찰 ③ 염오(강한 위빳사나) ④ 탐욕의 빛바램(이욕. 도) ⑤ 해탈(과) ⑥ 구경해탈지(아라한과의 반조의 지혜)’. ‘해체해서 보기’가 되지 않으면 무상·고·무아를 통찰할 수 없고 그러면 염오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염오가 없이 탐욕이 소멸할 수 없고요. 탐욕의 소멸이 없는 해탈이 있을 수 없는 것이고요. 참나, 진아, 이런 것을 주장하면 그것은 무상·고·무아·부정과 정반대인 상락아정의 길로 가게 되어 있겠지요. 그것이 당연합니다. 부처님께서 상락아정은 전도된 인식이라고 그렇게 강조하셨음에도. ‘참나, 진아’를 주장하려면, ‘참나, 진아’를 실제 보았더나 ‘상락아정’으로 가지 않고 무상·고·무아·부정이 보이더라라는 정도의 주장은 최소한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될 리 없으니 ‘참나를 보면 바로 열반. 참나를 보면 만사 끝’이라는 식으로 또 이상한 길로 가게 되기 십상이지요. ‘① 해체해서 보기 ② 무상·고·무아의 통찰 ③ 염오 ④ 탐욕의 빛바램(이욕) ⑤ 해탈 ⑥ 구경해탈지’라는 말이 『상윳따 니까야』에만 400번 이상 나온다고 하지요. 불자라면 우선 부처님 말씀에 근거하여 그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마음이라는 요술쟁이’에게 범부들은 항상 속아 넘어가게 될 테니까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user-ek3my4fq4c
@user-ek3my4fq4c 10 ай бұрын
신두교에서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읍니다.
@user-yv7ko8sd1c
@user-yv7ko8sd1c 4 ай бұрын
뭔말인지.. 윤회에 대해서 경전에 대해선 뭐가 어떻다는 말은 안나와도 워낙 당연한거라.. 생과사를 벗어나는게 해탈이라는 말이 다있으니 윤회가 들어있음...그런생각을 하는데 윤회를 해도 잘태어나면 윤회도 좋은게 아닌가. 태어나면 죽는게 고통스러운데.. 그러면 왜 네팔같은 불교의 수행자들이 다음생에 좋은데서 태어나려고 수행한다는 말을 하는지 오류가 있어요..다시 태어나지 않으려고 하는게 부처님의 수행인데.. 다음생에 좋은데서 태어나려고 수행을한다는 말은 오류가 있죠..
@user-hp7rq5yz6y
@user-hp7rq5yz6y 24 күн бұрын
부처님이 신이 아니라면 그 분 말씀에 오류가 있는 것도 당연한 거 아닌가? 윤회가 있다면 기독교의 부활도 당연히 있는 게 맞다.
@user-kv3zy2yy8t
@user-kv3zy2yy8t Жыл бұрын
아비달마를 초기불교로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의견 잘 보았습니다. 초기불교의 정의는 여러 가지로 할 수 있겠지요. 각묵 스님께서는 초기불교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의하십니다. ① 부처님과 직계제자들의 가르침 ② 삼차결집에서 결집이 완료된 가르침 ③ 현존하는 빠알리 삼장에 전승되어 오는 모든 가르침. 자세한 것은 『초기불교 이해』제1장을 참고하세요. 아비담마는 초기불교의 핵심이고, 당연히 초기불교에 포함됩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jennyw5947
@jennyw5947 10 ай бұрын
향봉스님 어쩔 😂
@phillipkim9004
@phillipkim9004 Жыл бұрын
사두 사두 사두.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고맙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
@user-ek3my4fq4c
@user-ek3my4fq4c 10 ай бұрын
윤회가 왜 괴로움인가요? 인간 존재를 진화 시키기위한 우주의 카르마적 설계인데
@younghyunbaek5357
@younghyunbaek5357 9 ай бұрын
여기서 따지시는 분은 논리로 따지기보다는 수행을 해보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이 침묵을 지키신 부분은 전혀 도움 안돼는 논쟁거리가 되기때문이 아닐까요 깜깜한 까막눈이 글자를 본다고 이해가 되나요 듣고 써봐야죠 아잔차 스님이 아는 체하는 불교학자에게 달걀은 줍지않고 닭똥만 줍는다고 나무란 것처럼요
@user-kv3zy2yy8t
@user-kv3zy2yy8t Жыл бұрын
삼세라니요...과거 현재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데 삼세라니요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초기불교TV 채널 관리자입니다. 의견 잘 보았습니다. 아비담마의 82법에 시간은 없습니다. 그렇게 보면 시간은 구경법이 아니고 개념(빤냣띠)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궁극의 이치 차원에서 보면 내가 없지만(나라고 할 만한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지만), 우리는 일상적인 표현과 일상적인 용어로 나라고 부르며 살고 있지요. 부처님께서도 궁극의 이치 차원에서도 말씀을 하시고 일상적 용어(개념)로도 말씀을 하셨고요. 부처님께서도 당연히 ‘과거 현재 미래’라는 용어를 말씀하셨습니다. 구경법(담마)과 개념(개념법)을 먼저 구분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아래 동영상이 조금 도움이 될 것입니다. kzfaq.info/get/bejne/j8dgaKpjlby9pn0.html (5장. 법, 초기불교의 핵심 | 법으로 해체해서 보기 | 법과 개념의 이해 (초기불교이해 제5장 내레이션)) 초기불교를 진지하게 공부해 보실 것을 권해 드리며,『초기불교 이해』에 있는 한 대목을 옮겨놓으며 글을 줄이겠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2) 초기불교와 아비담마는 아공법유를 주장하는가: 반야·중관을 추앙하는 자들은 이러한 아비담마의 입장을 아공(我空)은 설하지만 법공(法空)은 말하지 못하고 법유(法有)를 주창한다고 비난하며 그래서 아비담마는 소승이라고 폄하한다. ... 반야·중관의 이러한 주장은 무엇보다도 불교의 뿌리요 불교의 출발점인 세존을 소승배로 취급하는 오만방자함을 드러낼 뿐이다. ... 분석과 해체를 무시한 채로 반야·중관적인 직관이 극단으로 가면 부처님 원음까지 부정해 버리는 모순이 생긴다는 것을 거듭 지적하고 싶다. 분석과 직관이 서로 보완하고 서로를 견제할 때 그것이 진정한 중도적 입장일 것이다. 직관만 강조하다 보면 그것은 옹졸하고 편헙하고 과격하고 극단적인 도가 되어버린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초기불교 이해』제9장 156~158쪽 부분 발췌)
@4121bnoy
@4121bnoy Жыл бұрын
법륜스님 1패 인가요?
@tipitaka1
@tipitaka1 Жыл бұрын
시청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user-ev8iw9sq6j
@user-ev8iw9sq6j Жыл бұрын
법륜스님은 방편으로 윤회가없다고 하신겁니다! 현생을 잘살면 삼생이 다 좋아지니.. 현생에 집중하는게 해탈의 근원이다! 해서 그런 먼미래말고 지금이생에서 어떻게 살것인가를 말한것이고 그것에 방편을써 빗대 이생이 윤회라고하시며 좋다가 싫다하는게 윤회라하신겁니다! 법륜스님도 윤회있다고 즉문즉설에서 그런거생각말라고 지금이 좋으면 전생도 좋은것이고 내생은 더좋아지는것이된다면서 전생과 내생을 설하셨습니다!!! 사람들의 현재 집안사부터 우울증 자살충동 괴로움을 없애주시고 살려주고 건져주셔서 집안에 자살 살인 미움시기다툼 어리석음을 다 막아주신분이십니다! 물론 저도 저희아버지덕에 죽을것같아,, 법륜스님같은 법의아버지를 세상좋아져 유튜브로 만나게되어 부처님법까지 완전 들어서게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번뇌라는재료로써 법륜스님란 인연을 지어주셨고 그러써 부처님법이라는 큰것을 만났기에.. 내 아버지 법륜스님 석가모니부처님이 저에겐 감사함 스승입니다!!! 번뇌 죽 보리로~~ 제바달다가 스승이라하신 부처님도 그렇고 역행보살,반면교사,악번뇌살인자까지도 스승이며 내업이며 그들의 자신잘못을몰라 안타깝지만.. 그래서 필요한 벌도 써야겠지만.. 그들이 세상을 더 좋아지게하는 재료입니다!!! 그래서 두가지가없으면 돌아갈수없습니다!!! 꼭 필요한 앙굴리말라도 제바달다도 비유리왕도 나름의 사람들입니다!
@user-bx7ee5ws4x
@user-bx7ee5ws4x 3 ай бұрын
법륜 등이 부인해도 많은 괴학적 증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안 스티븐슨 에드가케이시 이븐 알렉산더 등등등.. 성경에도 윤회가 있고(성경에서 윤회기록 정치적 목적으로 다 없앴지만...) 과학으로 증명되는 윤회가 없다? 그런 스님 퇴출제도 없나 아~종권도전은 아니니까 없겠네요
@user-su8dx1si9o
@user-su8dx1si9o 24 күн бұрын
이스님은 좋은말을하더라도 보는이로하여금 정신사납게만들뿐더러 좀 내리시오 지나가는 아무개
@user-ek3my4fq4c
@user-ek3my4fq4c 10 ай бұрын
윤회를 거듭하므로 인간 영은 점차로 진화합니다. 윤회는 우주의 카르마 의 법칙 입니다. 윤회는 영원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축복입니다. 육체의 죽음도 진화하기 위한 신성의축복이라고볼수있지요.
@user-ek3my4fq4c
@user-ek3my4fq4c 10 ай бұрын
😅
@user-ek3my4fq4c
@user-ek3my4fq4c 10 ай бұрын
붓다는 형상만으로 연기론을 보았기에 죽음이 축복임을 각성하지 못했지요!
@user-ek3my4fq4c
@user-ek3my4fq4c 10 ай бұрын
아트만은 자아가 아니랍니다! 아트만( 내재하는신성)은 의식입니다. 스님은 힌두교에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군 불교의 도그마로서는 힌두교의 아트만을 이해할수가 없지요
@younghyunbaek5357
@younghyunbaek5357 9 ай бұрын
힌두교에서는 내재하는 신성은 변하지않는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말한 변하지않는 그것이 자아입니다 부처님은 그 신성마저도 변하고 통제할수 없다 하셨습니다 마음자체가 찰나마다 셀수없을 만큼 변화하는데 신성이 어디있나요
@user-wr8qy6xp8x
@user-wr8qy6xp8x 9 ай бұрын
당연하죠 부처님은 브라만의 카스트를 부정하기위해서 설하셨고 또 그 불교를 반대하여 혹세무민 정치수단으로 이용해보려고 한게 힌두교의 아트만인데 불교의 도그마로 이해가될수가 없는거죠 당연한 이야기 무명의 족쇄에서 벗어나시고 불교에 귀의 하시길 바랍니다.
@user-zv3pg7rb1h
@user-zv3pg7rb1h 24 күн бұрын
석가모니 부처님은 분명히 " 윤회 " 를 설명 했습니다. 단지 제자들이 " 윤회"에 대한 지혜가 부족해서 경전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불교 교리 " 망언"을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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