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긍대부가 병 속의 오리를 어떻게 살릴 수 있느냐고 묻자 남전 선사가 그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방법이 이 영상에 나와 있습니다. * 텍스트 : 오쇼 라즈니쉬, 텅 빈 가슴을 넘어서, 태일출판사. * 이 영상에 사용한 동영상과 이미지는 pixabay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알아들을 이유도 필요도 없음. 그건 시간낭비. 차라리 부처님의 원음인 불경을 직접 읽는 게 정도임.
@vviva145 ай бұрын
대부 정말 기발하다
@이야기를품은도깨비5 ай бұрын
훌륭한 거사죠. 감사합니다.
@user-jr4bj9gl8j5 ай бұрын
석가모니는 선문답을 주고받는 식으로 법을 설하지 않았다. 선문답은 불교의 중국식 변용이다. 염화미소라는 에피소드도 그 변용의 일례다. 석가모니는 당대의 일상어를 가지고 대중이 알아들을 수 있는 설법을 했지, 자기들끼리만 알아먹는 암구호 같은 선문답은 삼갔다.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는 말을 왜 굳이 수수께끼 화법으로 하나? 그렇게 하면 뭔가 있어보인다고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참 유치하고 찌질한 거다. 선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그냥 중국인들이 만든 신흥종교다.
@이야기를품은도깨비5 ай бұрын
네 동의합니다.
@user-ne5jo9km7l5 ай бұрын
남전
@이야기를품은도깨비5 ай бұрын
편안한 밤!
@OhGoodLife5 ай бұрын
좋은 논의의 장이네요. 그런데 하나 의문이 들어 씁니다. 깨달음이 과연 무에 대한 경험일까요? 무는 없다는 뜻인데, 없는 것은 경험이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누가 공을 경험하고 돌아와 보고했다면 그는 공을 경험하지 않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보고할 그 사람이 없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부처님은 대아를 가르치셨지요. 그것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적멸은 들끓는 번뇌에 대해 쓰는 말이지, 근원이 없다는 뜻은 아닐 겁니다. 물질적 유한성을 갖지 않는다는 게 없다는 뜻은 아니지 않을까요?
@이야기를품은도깨비5 ай бұрын
있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기에 이리 말한 게 아닌지요. 공부할 때마다 한계에 접합니다.감사합니다.
@OhGoodLife5 ай бұрын
@@이야기를품은도깨비 짧지만 깊이가 느께지는 답변,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의 가르침이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해와 깨달음은 전혀 다른 경계이나, 어떤 내적 지식이 내생을 포함한 앞길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박사님은 공이 최종의 진실이 아님을 설명하신 적이 있는데, 한국 불교에서 가장 많이 독송하는 반야심경이 공을 지향하는 것 같아서 공이나 무에 대한 내용을 보고 짧은 지간을 내었습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user-jr4bj9gl8j5 ай бұрын
그 없음을 경험한라는 거죠. 그래야 집착이 사라지니까. 정확히는 없을 '무'가 아니고, 비어있음 '공'임. 없을 무는 쉽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가령 여기 있는 물컵을 치워버리면 물컵은 없어지는 것과 같이, 무는 유의 상대개념이고 유는 무의 상대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없는 게 아닙니다. 반면 공은 유무를 공히 존재가능하게 해주는 필드 자체를 뜻합니다. 모든 존재자들이 존립할 수 있는 기반입니다. 공이 없다면 유도 없고 무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