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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부터 말하자면,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뀌는 시점에서는 이전의 불교이념을 폐기하고 대륙에서 새로 정착한 주자학을 이념으로 삼는 왕조를 건국한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고려왕조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는 당시 대륙의 사유체계와 문화를 휩쓸고 있는 불교의 이념을 잘 받아들인다는 흐름을 분명히 했습니다(이념이라고 할 만하지는 않지만. 건국이념이라는 개념 자체가 매우 현대적인 개념임) 그 이전 시대 건국 과정들에서는 적시할 만한 사료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전과는 차별 지으려는 여러 정황들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국가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사적인 차원의 여러 케이스에서도. 미중갈등에서 한국의 요긴한 대응은 정치적 대응이 우선이겠지요. 문화표준으로 말하자면, 서구문화와 한자문화의 경계면에 있는 한국은 현재는 두 문화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둘을 아우른 다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의 흐름이 어떤 방향으로 될 것인지는 예측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노력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외형적으로 과거 모습을 재현하는 것만을 전통을 잇는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요즘 한국에 있는 것을 복고 경향이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그것을 나쁘거나 위험하다고 비판할 수만은 없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행동에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지향하는 바가 있으면서 과거를 참고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자, 이런 사고에서 나타나는 경향이라면 무의미하거나 위험한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국 젊은이들이 고대의 문물, 건축, 복장 등에 대해 관심 두는 것이 과연 어떤 기반에서 나오게 되는 경향인지는 현지에 있지 않은 사람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커진 국력에 대한 자부심이 그런 쪽으로 나타나지 않을까 합니다. 복고라면 어떠한 이유로 무엇을 복고하겠다는 것인지 살펴야 합니다. 서구문명에 대해서나 한자문명에 대해서나 비판이 필요한 것은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따라서 무엇을 향한 비판인가 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자칫하면 한국이 중국을 따라가느냐 서구를 따라가느냐의 문제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표준은 스스로, 주동적으로 해야 파워를 갖게 됩니다. 파워 있는 문화란 곧 가치 있는 문화이며, 가치를 지니려면 매력을 지녀야 합니다. 인류는 누구나, 어느 지역에서나, 매력 있는 문화, 온 세계 인류, 특히 젊은이들이 매력을 느끼는 문화를 꾸려가려는 데에 열정을 쏟아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유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 차지하려는 욕망, 분수없는 자존감, 이런 것들에만 매몰되는 열정이 커가는 지역은 위험한 지역이라고 봅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격려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지식이라는 기준으로써 말하자면, 세상에는 지식 생산자도 있고, 지식 엔터네이너도 있고, 지식 상인도 있을 겁니다. 서로간 높낮이를 말할 필요 없이 모두 자기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 훌륭하다고 봅니다.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 가운데 도올선생은 지식 엔터테이너로서 훌륭한 분입니다. 류시민은 스스로 지식소매상으로 자처하지만 엔터테이너와 행동가로서 훌륭한 분입니다. 저는 한자문화권의 문화를 점검할 수 있는 독자적인 패러다임을 구축하고자 배우는 사람일 뿐입니다. 선생님 지적대로, 풍우란 등 영어권에서 활동한 중국 학자들의 견해는 왜곡이 심해서 도무지 동의할 수 없기 때문에, 한국 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의 공부를 저는 많이 기대합니다. 함께 공부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문화'는 실체를 알기 어려운 용어입니다. 서구에서 제국주의가 형성되면서 자신들의 우월성을 합리화하기 위해 civilization(문명)이니 culture(문화)니 하는 용어를 만들었지요. 따라서 "한국은 문화에 관한 일들이 취약하다."라거나, "한국은 문화지체 현상이 심하다."라는 선생님의 생각은, 문화를 서구풍의 요소 가운데 현대적인 어떤 실체(substance)로 여기는 생각입니다. 문화는 그저 '인류의 생활양식'으로 보면 됩니다. 뒤지거나 지체현상이 있거나 하는 성질의 것으로 규정하면 문화제국주의 오류를 범하기 쉽습니다. 다만 '인류의 생활양식'은 매력이나 편리성에 따라 경계를 넘어 흘러다닙니다. 세계인은 각자 편익이 많고 매력이 많은 문화를 만들고 그것들은 서로 넘나듭니다. 만약 한국인들이 오래 지녀왔던 생활양식이 한국 밖으로 퍼진다면 한국인의 편익은 늘겠지요. 한국은 문화가 취약하거나 지체현상이 심한 나라가 결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