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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인 간화선을 살펴보겠습니다.
간화선은 12세기에 중국의 도교 전통과 인도의 불교 전통이 결합해 탄생한 동북아 고유의 수행법입니다.
부처님이 창안한 수행법의 핵심은 아나빠나사띠 혹은 수식관이지 화두를 드는 간화선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화두를 들라는 가르침을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간화선(看話禪)의 ‘간(看)’은 ‘본다’는 뜻이며, ‘화(話)’는 ‘화두(話頭)’를 말합니다.
즉 화두를 바라보아 선(禪)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법입니다.
12세기 중국 송나라 때 조동종의 굉지선사가 묵조선(默照禪)을 제창해 크게 유행시켰습니다.
묵조선은 고요하게 앉아 좌선하는 행위 그 자체가 깨달은 부처의 모습이고 앉는 것 자체가 최고의 수행법임을 강조합니다.
한편, 같은 시기에 활약하던 임제종의 대혜선사는 묵조선을 엉터리 수행법이라고 비판하면서 화두를 드는 간화선을 제창했습니다.
(출처: 내면소통 642 - 651)
현재 한국과 중국에서는 간화선을 수련하는 임제종이 최대 종파이고, 일본에서는 묵조선을 들여온 도원선사 덕분에 조동종이 최대 종파다. 그리고 이 묵조선의 수행법이 2차세계대전 이후에 좌선(坐禪: zazen)이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유럽에 전파되어 널리 알려졌다. 그 결과 서양에서 유행하게 된 젠(zen) 스타일과 문화는 주로 일본의 묵조선 전통을 기반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이나 중국의 화두선은 서구 대중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본격적으로 명상 수행을 하는 인구가 늘면서 위빠사나 전통과는 확연히 다른 한국의 참선 수행에도 관심을 기울이는 서구인들이 점차 늘고 있다.
대부분의 화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선사와 제자가 대화를 나누는 형식의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화록 하나하나를 ‘공안(公案)’이라 부르고, 그 공안의 핵심 아이디어를 담은 짧은 문구를 ‘화두’라고 한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무엇이 부처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동산선사의 대답.
“마삼근(麻三斤).”
“무엇이 무위진인(無位眞人)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임제선사의 대답.
“똥 묻은 막대기(幹屎槨).”
“개에게 불성(佛性)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선사의 대답.
“없다(無).”
“부처나 조사를 만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는 질문에 대한 임제선사의 대답.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라(殺佛殺祖).”
“달마조사가 동쪽으로 오신 뜻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선사의 대답.
“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조사가 서쪽에서 온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조주선사의 대답.
“앞니에 털이 났다(板齒生毛).”
11세기 초에 도언선사가 쓴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1700개의 어록 및 행적 등이 정리되어 있다.
이를 ‘1700공안’이라 부른다. 설두선사는 여기서 100개의 공안을 뽑아서 정리하고 송(頌)을 달아 《설두송고(雪竇頌古)》를 저술했다.
여기에 다시 대혜선사의 스승인 원오선사가 수시(일종의 문제 제기), 평창(본칙과 송에 대한 해설), 착어(짧은 평가) 등 다양한 형식의 코멘트를 달아놓은 명작이 《벽암록(碧巖錄)》이다.
이 책이 하도 인기를 얻어 사람들이 화두가 아니라 책에만 의존하게 되는 폐단이 있다 하여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선사는 자기 스승의 책인 《벽암록》을 아예 불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공안(公案)’이란 관공서의 공식적인 문서라는 뜻이다. 공안이란 말 속에는 과거 스님들의 언행 기록을 마치 공식적인 문서와도 같이 권위 있는 텍스트북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공안이라는 말을 통해 송나라 때의 불교는 성리학의 유교적인 전통과 경쟁하는 관계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화두는 보통 스승이 제자에게 하나 골라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행자가 아무 화두나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고르는 것이 아니다. 1700개가 넘는 공안이 전해져 내려오고 《벽암록》에만 100개의 공안이 정리되어 있지만, 수행자는 그저 스승이 내려준 화두 하나를 붙들고 매일 끈질기게 씨름해야 하는 것이 간화선의 전통이다.
수행자가 자율성을 발휘해서 오늘은 이 화두 들었다가 내일은 저 화두 들었다가 하면 안 된다.
대부분의 공안은 스승과 제자의 대화 형식으로 이뤄져 있다. 간화선은 스스로 깨달음을 추구하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스승의 절대적인 권위에 의지해서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다. 스승과 제자의 일종의 팀워크인 셈이다. 혹은 멘토링 시스템이다.
화두를 주는 것도 선지식(善知識)이라 불리는 스승이고, 버럭 화를 내며 고함을 치거나 혹은 죽비로 내려치는 것도 스승이고, 제자가 화두를 통해 깨우쳤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도 스승이다.
공안에 등장하는 스승은 ‘깨달은 사람’이고 대화 상대는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공안 속의 대화는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간의 대화이고 그 구분은 철저하게 지켜진다.
중간이란 없다.
깨달았거나 아니면 아직 못 깨달았거나 둘 중 하나다.
설화가 담긴 공안만이 선사를 깨달은 사람으로 입증해준다.
그러한 설화 이외에는 선사의 깨달음을 입증해주는 다른 어떤 근거도 없다.
따라서 깨달은 자를 깨달은 자로 인정해주고 선사로 등극시켜주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도 못 깨달은, 그리고 앞으로도 깨달을 가망이 거의 없어 보이는 제자들이다.
깨달은 자는 못 깨달은 자들 덕분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반대는 성립하지 않는다.
못 깨달은 자들이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은 스승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깨달은 자들은 못 깨달은 자들의 인정 덕분에 깨달은 자의 자격을 획득한다.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한다 해도 제자나 일반인들이 인정하고 떠받들어주지 않으면 깨달은 자가 되지 못한다.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 깨닫지 못하고 헤매는 것은 대개 그들의 우매함과 게으름과 무지몽매함 탓으로 여겨진다.
절대 스승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스승이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해서 아직 못 깨달은 경우는 없다.
스승의 교육 방법에 대해서는 논의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스승은 제자의 교육에 대해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제자가 깨닫지 못하면 전적으로 제자 자신의 잘못이다.
수많은 선사 중에서 제자를 가르치는 교육 방법 때문에 비판을 받은 선사는 하나도 없다.
스승은 늘 절대 선이고 진리이며 따라야 할 존재다.
제자의 본분은 어느 날 갑자기 문득 깨달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스승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붙들고 계속 씨름하는 것이다.
선지식이라 불리는 스승에게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는 시스템은 제도로서의 불교가 자리를 잡는 데는, 그리고 절이라는 조직의 운영을 위해서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마음근력 향상이라는 교육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다. 선지식의 권위가 꼭 필요한 간화선 수행법은 MBSR과 같은 매뉴얼화된 훈련 프로그램으로 개발하기도 쉽지 않다. 다만 간화선 수행에서
다뤄지는 선문답의 역할에 대해서는 뇌과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선사의 갑작스럽고도 맥락에서 벗어나는 답변이나 행동은 제자들의 내부상태에서 습관적으로 작동하는 자의식을 순간적으로 뒤흔들어놓는다. 기존의 자의식이 능동적 추론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때 자기참조과정 훈련을 꾸준히 수행해온 제자들은 자의식이 무너져내린 그 텅 빈 자리를 볼 수 있게 되고, 텅 비어 있는 배경자아로서의 진짜 ‘나’를 문득 알아차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생성질서를 잠시 ‘멈춰 세움’으로써 새로운 생성질서를 의식에 심어주는 기회를 만들어내는 선문답의 기법이다.
이는 평소에 하던 자기참조과정과는 수준이 다른 근본적인 자기참조과정이 이뤄지게 하는 수행법이기도 하다. 이렇듯 간화선 수행의 선문답이 일종의 강력한 충격요법이기에 절대적 권위를 지닌 스승의 존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내면소통 명상에서는 가이디드 명상(guided meditation)을 통해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방식으로 맥락에서 벗어나는 감각자료나 언어자극을 제공함으로써 기존의 생성질서와 능동적 추론 방식을 흔들어놓는 변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 이것이 간화선의 방법을 매뉴얼화된 현대적 교육 프로그램으로 개발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간화선의 핵심은 선사들의 황당한 답변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답변이 강력한 자기참조과정을 유발함으로써 기존의 생성질서를 무너뜨리고 자의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이뭣고’ 화두와 자기참조과정
‘이뭣고’ 화두는 인식주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근본적으로 답변할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다. 인식주체는 인식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은 눈을 볼 수 없고, 칼은 칼을 벨 수 없으며, 물은 물을 씻을 수 없다.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자기 눈을 볼 수 없고, 아무리 날카로운 칼도 칼 스스로를 벨 수 없으며, 아무리 더러운 물이어도 깨끗한 물로 씻어낼 수 없다. 그래서 ‘이뭣고?’에 대한 대답은 항상 ‘모른다’이다. 이 ‘모른다’는 ‘안다’의 반대로서의 모름이 아니다. 알 수도 있는 것을 잠시 모르는 상태가 아니다. 이 ‘모른다’는 근본적인 ‘모름’이다.
그래서 ‘모른다’ 자체도 또 하나의 화두가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모른다는 것인가? 그것도 모른다. 모름의 대상도 모른다. 무엇을 모르는지 안다면 그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모른다고 하자마자 금방 또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의 그 텅 빈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무한한 자유로움과 고요함을 즐기는 것이 ‘모른다’ 화두의 핵심이다.
‘모른다’ 할 때는 늘 텅 빈 자리가 나타난다. ‘모른다’는 곧 무(無)다.
‘있음’의 반대로서의 없음이 아니라 ‘이뭣고’가 가져오는 알 수 없는 텅 빈 그 자리가 바로 무(無)다.
따라서 ‘이뭣고’ 화두가 지향하는 바는 숭산스님의 ‘모른다’ 화두나, 조주선사의 ‘무(無)!’ 화두와 같다.
이뭣고, 모른다, 무(無)!는 모두 대상 없는 인식을 통해 강력한 자기참조과정 훈련을 하는 수행법이다.
배경자아의 텅 빈 자리를 들여다보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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