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산' 개봉 기념] 2020년 100만뷰 '한산도대첩' 영상 재업(한국어·일본어 자막 추가 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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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필 한국사

황현필 한국사

Жыл бұрын

태백광노가 되어주셔서 영화 《독립전쟁》 제작에 참여해주세요.
/ @hwang_history

Пікірлер: 860
@hyewon943
@hyewon943 Жыл бұрын
황현필역사선생님 항상감사합니다 잘챙겨보고있답니다 황현필tv만세 👍 👍 👍 👍
@user-si7hd8dl6h
@user-si7hd8dl6h Жыл бұрын
저는 한산 극장에서 3번 연속 봤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은 판옥선이 그 자리에서 360도 회전 할 수 있다는 장점을 살린 전술이며,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일사불란하게 배를 선회 할수 있는 것은 그때 당시 엄청난 많은 훈련을 감내 하였을 격군들에게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물론 장군님의 전략과 전술도 중요 했지만 그 당시 장군님과 혼연일체 되어 왜적과 싸우신 한분한분 모두에게 이 영광을 돌립니다. 저는 한산에서 거북선이 나올때 나도 모르게 가슴에 뭉클해졌습니다.
@user-bm8mi3rz3j
@user-bm8mi3rz3j Жыл бұрын
저도 영화 보면서 당시 격군이셨던 조상님들께 감사했습니다.7월이면 엄청 더웠을텐데, 며칠을 노를 저어 전투지로 이동하고, 그 대단한 학익진을 전개하고...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훈련 하셨을 그 분들을 생각하니 😭
@Khy8653
@Khy8653 Жыл бұрын
너무나 감사하고 감동이고 노 저으셨던 조상님 들 너무나 ㅠㅠ 지금의 이 나라 상황이 오버랩 되면서 적폐를 물리쳐야 겠다고 다짐합니다
@user-hw7ig8cu4v
@user-hw7ig8cu4v Жыл бұрын
3번이요? 저도 한 번 더 볼려하는데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ㅠ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은 한국인이 만든 데타라메이다.
@user-lz8ip5cr8c
@user-lz8ip5cr8c Жыл бұрын
나는 귀하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이순신장군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존경하지 않습니다. 나는 손자병법을 1000번 이상 읽은 사람으로 병법에 의해서만 판단할 뿐입니다. 먼저,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이 세분과 이순신 장군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공히 단 한번의 전쟁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거나 항복 조인식을 하게 만든 레벨의 사람이고, 동시에 최고사령관들이었고, 이순신은 공적이 그 수준에 가려면 너무나 멀었으며 직책 또한 해군사령관에 미치지 못합니다(조선시대 때 수준은 육군의 보조세력이었지 별개로 존재하는 그 어떤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해군사령관보다 한참 못미치는 직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바로 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있었고 더 위에는 다른 통합 관찰사가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메이지유신 이후 해군을 맡은 사쯔마군벌이 일본에 해군 영웅이 없어 대타로 이순신을 해군 영웅으로 만들어서 1900년대 초 부터 매년 해군 수뇌부진이 진해 현충사를 방문하며 영웅으로 길러내는 짓거리를 했었는데, 일제를 추종했던 박정희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웅화 과정을 거칩니다. 이순신장군의 성격은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그야 말로 한 성깔하는" 사람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거룩한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유튜브에서 한산도 대첩이 다루어졌지요. 결과 일본은 수전을 금한다는 토요또미의 명령이 내려 왔구요. 학익진을 사용하지 않고 일자진을 사용해서 오는 적들과 T 자 형태로 이루어서 대치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시간만에 끝날 싸움이 3시간으로 늘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학익진을 대단한 작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를 할 때 학익진으로 적 6만명을 몰사시킵니다. 학익진을 포위 공격의 가장 기본적인 진법일 뿐입낟. 한산도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설치한 게 1593년 4월 1일로 기억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여러 트러블, 사단에 휘말려(아니면 만들어내는 바람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간 때는 1597년 7월 초로 저는 기억합니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워서 이상한 모습으로 통제사에서 계급없는 직책으로 내려올 때까지 만 4년도 더 경과합니다. 만 4년은 전쟁 중에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내가 이순신이었으면 한산도에 본영을 세우는 순간 전략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세웠을 것입니다. 1. 거제도를 점령한다. 한산도에 있으면 일본군도 견내량만 봉쇄하면 조선 수군은 적의 보급 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산도 바로 오른 편에 거의 붙어 있는 거제도를 점령하면 거제도에서 부산도를 직선으로 뻥 뚤린 바다를 통해 그대로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습니다. 거제도를 점령하려면 수군 중에 육군 역할까지도 해야 하는 오늘날의 해병대 병력을 2.5만명 정도 길러내야 합니다. 당시 이순신의 전라도에서의 위세, 종군하는 장군이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순신이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전함과 다른 함정을 만들어야 했었습니다. 함포는 뱃머리와 후미 정도에만 설치하고 대신 해병대 병력을 200명 승선시킬 수 있는 함정을 130척 건조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당시의 사거리가 가장 길었던 천자총통의 사거리 1Km 를 2Km 로 늘린 대구경 화포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적군들은 견내량이나 부산포에서 인근의 높은 산, 언덕 위에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곡사로 쏘면 1.3Kg 정도 사거리 나옵니다. 그래서 아군은 2Km 사거리가 필요했습니다. 직선 사거리는 200미터였는 데 직선 사거리 400미터로 화포를 개량해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승자총총은 세종대왕 시절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만든 무기로, 임란에 사용될 때는 만들어진 지 150년이 지났습니다. 마침 명나라에는 구경이 아주 큰 거대 화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차용하여 거대 화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2. 상기한 바와 같이 준비한 후, 거제도를 점령합니다. 해군, 해병대 협공. 3. 거제도를 점령하면 정탐당하지 않도록 거제도에 인접한 육지 지역을 총공격하여 싹 쓰러버려야 합니다. 이러면 적의 보급의 본거지인 부산포 공격 준비가 완료됩니다. 4. 마지막으로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배를 탐망하는 배를 띄워 온다면 연기로 신호를 하여 바다에서 요격해버리는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구원하려고 부산포에서 출격하면 그거야 말로 경사입니다. 5. 마지막으로 조선 육군, 명나라가 부산을 북쪽에서 밀고 내려가고 수군, 해병대가 바다에서 밀고 올라갔다면 이 전쟁은 안 보아도 척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93년 4월 1일 한산도에 수군통제영을 설치한 후 1597년 7월 초 통제사에 쫒겨날 때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귀하가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순신장군의 4년간의 방임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긋나니, 하는 시조는 읊조렸어도, 적의 심장에, 적의 간에 칼을 들이밀고 썰어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전란 중의 4년은 매우 깁니다. 나는 해병대 출신인데 2주일만 훈련소에서 훈련 받아도 눈에 뵈는 게 없는 해병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따라서 전란인 당대에 6개월만 훈련시키면 활, 검술, 창술, 조총술, 대포술, 항해술 등등을 대부분 마스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삼도수군 통제사 시절의 이순신의 4년, 정말 궁금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못한 이순신. 적의 본진을 매일 보기만 할 뿐 어쩌지 못한 이순신. 한계가 너무 큰 인물.
@tenafly9
@tenafly9 Жыл бұрын
저는 일본에서 대학원을 다녔고, 일본 준공기업에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십여년 살아서 일본어는 잘 합니다. 번역한 것을 보니, 명료하고 잘 되었네요.....황선생의 강의,,특히, 과거 이순신장군 관련 영상들을 모두 일본어로 자막이 되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목도 일본어로 해서, 일본인들이 많이 많이 황선생의 영상을 보고, 이순신의 위대함을 새삼스럽게 더욱 존경하게 하고 싶네요....황선생의 "이순신의 바다"가 일본어로 번역되어서 판매된다 하니, 영어판도 기대해봅니다. 황선생의 강의를 듣고, 내 역사지식의 가벼움과 역사의식의 엷음을 알았으며, 강의를 보고 들으면서 무거워지고 두꺼워지는 나를 보니, 더욱 감사합니다. 강건하십시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당신이 정말로 일본어에 능통하다면, 이순신에 관한 일본어의 Wiki를 읽어 주세요. 이 동영상으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 거짓말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tenafly9
@tenafly9 Жыл бұрын
@@hiroono1 일본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 보면은 일본 국내 전쟁에서 의병활동,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이 게릴라전을 펼친 적이 없습니다. 일본 다이묘, 영주가 항복을 하면은 그 영토에 있는 백성들은 순종하고, 정복한 영주는 그 항복한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고, 심지어 가신들까지 받아들이고, 그 가신들도 성심으로 충성했지요.....그래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그리 선조, 조선왕을 잡으라고 닥달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님의 의견은 매우 단편적이고, 매우 자학적입니다. 그리고 단기간에 한양에 도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황선생 강의영상을 모두 섭렵하셨으면 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tenafly9 당신의 주장은 논리가 데타라메이다. 일본에서 게릴라가 적은 것은 그대로이지만, 그것과 히데요시의 진군은 관계 없다. 조선인이 일본군을 환영한 것은 양반의 통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선군은 매우 약했다. 그것이 일본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한 이유다. 일본의 두 번째 진군에서는 중국군이 항전했기 때문에 싸움은 격렬해졌다. 어쨌든 이순신은 최근까지 일본에서도 조선에서도 잊혀진 존재였다. 한일병합시대에 조선에서 쫓겨나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을 격퇴한 영웅으로 이순신을 상징화하고 그의 거짓말을 '독립신문'에 실는 등 항일의 선구자에게 날조했다. 즉, 한국인은 여기서도 이승만의 데타라메에 춤추고 있는 셈이다.
@user-ou2nr3mt1d
@user-ou2nr3mt1d Жыл бұрын
한굴을 쓰고 있지만 한국사람은 아닌 댓글노예들이 많습니다. 이순신장군과 세종대왕의 역사적 업적을 격하시키려하며 (예를 들어 세종의 노비관련제도 때문에 노비가 늘어났다느니 하면서 공격합니다. 황선생에 의해 논리적으로 혁파된)궁극적으로 한민족이 열등하여 일본의 지배는 당연했다는 식의 논리를 펴려고하죠. 잘못된 주장임이 밝혀지면 댓글을 지우고 달아납니다 ㅋ
@user-jk5bm6su4j
@user-jk5bm6su4j Жыл бұрын
오늘 가족들과 영화 한산 보러갑니다. 이순신의 바다도 당연 읽었지요^^ 훌륭한 분을 제대로 알고 널리 전할수 있도록 글로,영상으로 만들어 주시는 선생님께 정말 감사하고 존경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user-ez4qn4oy4p
@user-ez4qn4oy4p Жыл бұрын
정은경=이순신, 백혜란?=원균?
@JohnMGYi
@JohnMGYi Жыл бұрын
가슴이 웅장 해 집니다 !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의 자리 다툼과 진짜 영웅들의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성심.. 영원히 같이 할 수 없는 슬픔에 대해 마음이 아려 옵니다 ! 언제나 그 엇박자는 계속 되었고 오늘날에도 진행 중 입니다. 다만 이제 국민이 그걸 그나마 조금 제대로 관여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희망 일 뿐 입니다 ! 그래서 국민이 깨어 있어야 만 합니다 ! 두눈 부릅뜨고 위정자들을 찾아내 발본 색원 해야 합니다 !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j.d.h5019
@j.d.h5019 Жыл бұрын
올 6월에 한산도에 다녀왔습니다. 통영에서 보트타고 섬에 내려 충무공의 영정도 뵙고 그의 발자취를 느껴보았습니다. 하늘나러에서도 지켜주시고 계시는 느낌이 와 다았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우리나라의 영웅이십니다. 영원히 호사카 유지 교수님 존경합니다. 황현필 선생님도요.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yun---
@hyun--- Жыл бұрын
어제 가족들과 '한산' 보고와서 이 영상을 보네요. 나라 지킨 선조님들께 순간순간 감사한 마음입니다. 🙏🙏🙏🙏🙏 역사를 바르게 알고 전하는 데에 진심이신 황현필선생님께도 감사드리구요.~^^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user-vy3ww1it4l
@user-vy3ww1it4l Жыл бұрын
전라도 정권 싫어요!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user-vy3ww1it4l 망상이라면 고질라 영화가 더 재미있다.
@user-ew9vt6wl9n
@user-ew9vt6wl9n Жыл бұрын
@@user-vy3ww1it4l ?????? 무슨소리을 하는거야 거기서 왜 지역구도가 나와 정신좀 차려라
@user-rm5bj4tf7n
@user-rm5bj4tf7n Жыл бұрын
@@user-vy3ww1it4l 경상도 문등이여? 아주 나라 버리는데는 일등이여
@suelyun4658
@suelyun4658 Жыл бұрын
어제 가족 전체 영화 보고 돌아오는길에 한산대첩 강의 다시 찾아봤는데 이렇게 다시 재업해주시니 다시 한번 더 보겠습니다. ㅎㅎㅎㅎ 그리고 마눌님이 영화보고 감동하길래 이순신 바다 책 보라고 줬더니 어제 밤부터 읽고 있는데 내일이면 끝낼 기세네요.. ㅎㅎ 너무 잼있다네요.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foxjun8379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user-wn9ob9tc3k
@user-wn9ob9tc3k Жыл бұрын
황샘 영상이랑 책 보고 어제 영화 보고 왔습니다. 이 영상 보고 영화 또 보러 가려 합니다. 거북선 등장할 때 소리 지를 뻔 했습니다.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역사 시간에 정말 이런 역사다운 역사 공부 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여 ..황샘 덕분에 역사에 관심 갖고 챙겨보고 있는 1인입니다. ^^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dawn_dew
@dawn_dew Жыл бұрын
호사카 교수님 연구소 일본어 자막팀께도 감사드립니다
@non-qp1pt
@non-qp1pt Жыл бұрын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며 다시한번 경의를 표 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장군님이 계셨기에 오늘의 우리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nrj64
@nrj64 Жыл бұрын
클릭후 일단 좋아요부터 누르는 믿고보는 황현필쌤~!!
@user-fb1cb4bl1u
@user-fb1cb4bl1u Жыл бұрын
한산 두번 봤습니다. 영화 보기 전에 황현필 선생님 한산도 대첩 영상이 생각나서 보고 관람 후에도 또 봤습니다. 이번 영화 정말 잘 나왔습니다. 김한민 감독이 전작 명량의 단점을 완벽하게 피드백해서 반영한 흔적이 보였습니다. 후반부 한산 해전씬은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날려버리는 화끈한 장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한산 용의 출현, 강력 추천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JKLEE-dc7lj
@JKLEE-dc7lj Жыл бұрын
질문드립니다 명량 복습하고 한산 보는게 좋을까요?시대순서대로 한산-명량 보는게 좋을까요?꼭 좀 알려주세요ㅠ
@user-fb1cb4bl1u
@user-fb1cb4bl1u Жыл бұрын
@@JKLEE-dc7lj 명량 꼭 복습 안하셔도 무방합니다. 한산 보고 명량 보셔도 돼요.
@JKLEE-dc7lj
@JKLEE-dc7lj Жыл бұрын
@@user-fb1cb4bl1u 감사합니다^^이번에 한산보고 명량 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user-ji3qe3cn6j
@user-ji3qe3cn6j Жыл бұрын
선생님 덕에 알게 된 황진 장군이 한산에서 등장하는 신이 나올때 저도 모르게 물개 박수를~~^^;;; 선생님의 책을 읽고 한산을 보니 감동이 두배 이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paradoxxangel7033
@paradoxxangel7033 Жыл бұрын
오늘 영화한산을 보고 왔습니다. 거기서 웅치전투 얘기를 보고 이렇게 황현필쌤의 강의를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황진장군님 이름이 자막으로 나오고 짶게 나오는데 한산대첩과 웅치 이치 전투를 함께 그려냈다면 어땠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한편으로는 통쾌하면서 한편으로는 비장했을것 같네요. 그나저나 이 영화보고 다시 느낀거지만... 원균 정말 어쩔꺼야 ㅠㅠ 같은 군대를 가지고 누군 한산대첩을 누군 칠천량을 만들어 냈으니...지금 우리나라 대통령이 떠오르고... 리더의 중요함을 다시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황현필쌤 감사합니다.
@user-qr5pp4mu8r
@user-qr5pp4mu8r Жыл бұрын
선생님 강의는 한편의 스펙타클한 영화를 보는듯 정말정말 재미있습니다. 감사합니다.
@bananatree8961
@bananatree8961 Жыл бұрын
일본어자막이 같이 나오니 일본인도 영상을 보게된다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어요. 무척 맘에 듭니다
@bananatree8961
@bananatree8961 Жыл бұрын
@@purealex100 그 부분에 있어서 강의가 좀 아쉽습니다
@user-mh1tu2ot1t
@user-mh1tu2ot1t Жыл бұрын
@@purealex100 원래 해적 집안이던 구키 요시타카랑 헷갈린 듯 싶습니다
@MalangMolang
@MalangMolang Жыл бұрын
(책보고)에도 찐 한국역사들 다 나와요
@jinyoon7163
@jinyoon7163 Жыл бұрын
@@purealex100 한산도 대첩 때문에 오히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대접이 좋은 일본 다이묘.. 영화 한산에서도 엄청 포장되긴 했더군요 실제로는 이순신이 너무 발라버린 전투라서 영화상 극적인 긴장감을 주기 위해 그런것 같긴 한데..
@balgeure
@balgeure Жыл бұрын
와우! 일본어 자막이라니.....멋있다잉~👍👏👏👏👏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balgeure
@balgeure Жыл бұрын
@@hiroono1 개소리를 아주 정성스럽게 싸지르셨지만 시간 낭비하기 싫어서 자세히 읽지 않겠습니다 헛소리 선동 마시고 현생에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balgeure 한국인은, 이런 뾰족한 동영상을 보는 것이야말로 시간의 낭비라고 학습해 주세요.
@balgeure
@balgeure Жыл бұрын
@@hiroono1 오호~ 어리석은 중생이여~ 삶은 짧다오 지혜롭게 사십시오 . . 근데 대꾸해주니 좋아?
@user-gf5cc2kz8q
@user-gf5cc2kz8q Жыл бұрын
쌤 멋지십니다👏👏👏👏👏일본에서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널리 읽히는 책이 되길 바랍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user-id4qc3cb6g
@user-id4qc3cb6g Жыл бұрын
예전에 명랑을 보고 극한 상황에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이순신장군의 활약을 보며 눈물을 흘렸었어요..저희 아이들도 명랑을 보고 현충사에 가고 싶다하여 다녀왔었습니다.이번 한산을 보고는 이순신장군은 우리나라 전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성웅이란 생각에 감사함과 숙연함이 느껴졌습니다..뭐라 표현할수 없는 이 느낌...그저 존경하고 존경한다는 말밖에는... 성웅 충무공 이순신께서 어지러운 지금의 우리나라를 지켜주시리라 믿고 싶습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은 한국인이 만든 데타라메이다.
@user-lz8ip5cr8c
@user-lz8ip5cr8c Жыл бұрын
나는 귀하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이순신장군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존경하지 않습니다. 나는 손자병법을 1000번 이상 읽은 사람으로 병법에 의해서만 판단할 뿐입니다. 먼저,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이 세분과 이순신 장군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공히 단 한번의 전쟁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거나 항복 조인식을 하게 만든 레벨의 사람이고, 동시에 최고사령관들이었고, 이순신은 공적이 그 수준에 가려면 너무나 멀었으며 직책 또한 해군사령관에 미치지 못합니다(조선시대 때 수준은 육군의 보조세력이었지 별개로 존재하는 그 어떤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해군사령관보다 한참 못미치는 직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바로 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있었고 더 위에는 다른 통합 관찰사가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메이지유신 이후 해군을 맡은 사쯔마군벌이 일본에 해군 영웅이 없어 대타로 이순신을 해군 영웅으로 만들어서 1900년대 초 부터 매년 해군 수뇌부진이 진해 현충사를 방문하며 영웅으로 길러내는 짓거리를 했었는데, 일제를 추종했던 박정희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웅화 과정을 거칩니다. 이순신장군의 성격은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그야 말로 한 성깔하는" 사람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거룩한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유튜브에서 한산도 대첩이 다루어졌지요. 결과 일본은 수전을 금한다는 토요또미의 명령이 내려 왔구요. 학익진을 사용하지 않고 일자진을 사용해서 오는 적들과 T 자 형태로 이루어서 대치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시간만에 끝날 싸움이 3시간으로 늘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학익진을 대단한 작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를 할 때 학익진으로 적 6만명을 몰사시킵니다. 학익진을 포위 공격의 가장 기본적인 진법일 뿐입낟. 한산도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설치한 게 1593년 4월 1일로 기억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여러 트러블, 사단에 휘말려(아니면 만들어내는 바람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간 때는 1597년 7월 초로 저는 기억합니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워서 이상한 모습으로 통제사에서 계급없는 직책으로 내려올 때까지 만 4년도 더 경과합니다. 만 4년은 전쟁 중에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내가 이순신이었으면 한산도에 본영을 세우는 순간 전략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세웠을 것입니다. 1. 거제도를 점령한다. 한산도에 있으면 일본군도 견내량만 봉쇄하면 조선 수군은 적의 보급 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산도 바로 오른 편에 거의 붙어 있는 거제도를 점령하면 거제도에서 부산도를 직선으로 뻥 뚤린 바다를 통해 그대로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습니다. 거제도를 점령하려면 수군 중에 육군 역할까지도 해야 하는 오늘날의 해병대 병력을 2.5만명 정도 길러내야 합니다. 당시 이순신의 전라도에서의 위세, 종군하는 장군이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순신이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전함과 다른 함정을 만들어야 했었습니다. 함포는 뱃머리와 후미 정도에만 설치하고 대신 해병대 병력을 200명 승선시킬 수 있는 함정을 130척 건조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당시의 사거리가 가장 길었던 천자총통의 사거리 1Km 를 2Km 로 늘린 대구경 화포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적군들은 견내량이나 부산포에서 인근의 높은 산, 언덕 위에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곡사로 쏘면 1.3Kg 정도 사거리 나옵니다. 그래서 아군은 2Km 사거리가 필요했습니다. 직선 사거리는 200미터였는 데 직선 사거리 400미터로 화포를 개량해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승자총총은 세종대왕 시절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만든 무기로, 임란에 사용될 때는 만들어진 지 150년이 지났습니다. 마침 명나라에는 구경이 아주 큰 거대 화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차용하여 거대 화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2. 상기한 바와 같이 준비한 후, 거제도를 점령합니다. 해군, 해병대 협공. 3. 거제도를 점령하면 정탐당하지 않도록 거제도에 인접한 육지 지역을 총공격하여 싹 쓰러버려야 합니다. 이러면 적의 보급의 본거지인 부산포 공격 준비가 완료됩니다. 4. 마지막으로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배를 탐망하는 배를 띄워 온다면 연기로 신호를 하여 바다에서 요격해버리는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구원하려고 부산포에서 출격하면 그거야 말로 경사입니다. 5. 마지막으로 조선 육군, 명나라가 부산을 북쪽에서 밀고 내려가고 수군, 해병대가 바다에서 밀고 올라갔다면 이 전쟁은 안 보아도 척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93년 4월 1일 한산도에 수군통제영을 설치한 후 1597년 7월 초 통제사에 쫒겨날 때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귀하가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순신장군의 4년간의 방임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긋나니, 하는 시조는 읊조렸어도, 적의 심장에, 적의 간에 칼을 들이밀고 썰어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전란 중의 4년은 매우 깁니다. 나는 해병대 출신인데 2주일만 훈련소에서 훈련 받아도 눈에 뵈는 게 없는 해병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따라서 전란인 당대에 6개월만 훈련시키면 활, 검술, 창술, 조총술, 대포술, 항해술 등등을 대부분 마스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삼도수군 통제사 시절의 이순신의 4년, 정말 궁금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못한 이순신. 적의 본진을 매일 보기만 할 뿐 어쩌지 못한 이순신. 한계가 너무 큰 인물.
@user-lv3cq3cm2g
@user-lv3cq3cm2g Жыл бұрын
@@user-lz8ip5cr8c 이해피님의 수준이 너무 높아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이순신장군님에 대한 공부를 전혀 하지 않으면서 4년에 대한 행적을 직무유기로 비판하다니 납득이 되지않습니다 황현필선생님의 영상을 다 봤다면 이해가 되셨을텐데 말입니다 설령 이순신장군님의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그 당시의 한계로 보아야되는것이지 존경하지않는다? 그럼 이해피님이 존경하는 인물을 말씀해주시죠? 제가 아는 한 이순신장군님에 관해 연구하시는 교수나 학자들도 최소 수백명이나 되고 해군에서도 가르치는것으로 아는데 이분들은 다 바보란 뜻으로 들립니다 이순신장군님은 완벽하신 분이 아닙니다 나라에서 지원도 잘 안해주는 상황에서 군사훈련과 자체적으로 보급을 만드신 분입니다 여기서 더 얼마나 잘해야되는지...
@user-lv3cq3cm2g
@user-lv3cq3cm2g Жыл бұрын
@@user-lz8ip5cr8c 130척을 건조한다? 저는 군사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릅니다만 당시 일본 수군은 백병전에 능하기때문에 조선 수군은 반드시 원거리 공격만 해야됐습니다 원거리 공격에 화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 화포를 배에 실으면서 견딜 수 있는 판옥선은 칠천량해전때 120척이었습니다 4년간 판옥선과 거북선 제조에 힘을 썼었고 그리고 당시 전란이후였습니다 백성들과 나라를 위해 많은 예산이 투입했을텐데 고급 인력인 해병대를 육성할 돈이 어딨습니까? 그리고 부산포는 공격이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조선 육군은 상대해기 힘들어서 명군과 수군 같이 하려했으나 서로 의견이 달라 실패했고요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과 조선이 휴전을 맺었는데 부산포 공격을 어떻게 합니까?
@user-lv3cq3cm2g
@user-lv3cq3cm2g Жыл бұрын
@@user-lz8ip5cr8c 그리고 이순신장군님이 성역화된 측면이 있어서 말씀을 드리자면 유명하거나 존경받는 인물을 비판하실때 좀 주의하셔야겠습니다 예전에도 세종대왕,이순신을 비판하는 사람들과 댓글로 얘기한적이 있는데 그분들의 말은 합리적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공감했지만 요새 하도 친일파들이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본의가 오해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해피님께서 비판의 요지는 알겠으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존경받는 인물을 공격하실때에는 본인이 친일파가 아니고 어떤 사람이며 악의적인 뜻이 없다는것까지 말씀해야 조금이나마 인정받으실 수 있을겁니다
@user-ii7tz3rd2q
@user-ii7tz3rd2q Жыл бұрын
선생님!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국민학교 졸업 세대입니다.
@user-eu5fm3cn6y
@user-eu5fm3cn6y Жыл бұрын
개봉 첫날 가족들과 함께 보고 왔습니다. 영화 '한산'에서 미쳐 알지 못했던 부분을 영상을 통해 알게 되니 감동이 배가 되네요. 늘 우리의 역사를 역사 답게 가르치시는 영상들 감사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걱정하지 마세요. 이것은 한국인이 만든 데타라메이다.
@user-tq9kd2pv3z
@user-tq9kd2pv3z Жыл бұрын
@@hiroono1 데타라메(엉터리) 아닙니다. 모르면 공부하세요...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user-tq9kd2pv3z 1592년 4월 12일 오전 8시, 일본군의 제1대는 700종의 대소군선으로 쓰시마·오우라를 출발해, 오후 2시 지나 부산에 상륙했다. 부산을 지킨 조선군은 하루 만에 괴멸했다. 일본군이 육로 북상해 조선군은 공포에 몰려 잇따라 도망쳤다. 조선귀족(양반)에 의한 통치에 불만을 갖고 있던 조선민중은 일본군을 환영하고 식량을 헌상했다. 4월 29일 조선왕의 조상은 밤이 밝아지자 서울을 버리고 출발했다. 해가 뜨고 뒤를 돌아보니 성 곳곳에서 불길과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일본군의 도착 전에 조선인의 민중이 폭도화한 것이다. 도망치는 조상을 본 민중은 자신의 국왕에게 돌을 던졌다. 5월 2일 일본군은 10만명 이상의 대군이었지만 민중의 협력으로 행군이 원활하게 진행해 부산 상륙 후 불과 3주 만에 서울을 함락했다. 육군도 수군도 조선군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5월 7일 이순신은 마침내 수군을 재건해 일본을 기습했다. 그리고 7월 7일 한산도 해전까지 이승신은 몇 차례만 일본군을 기습해 성과를 올렸다. 다만, 조선군의 전술은 화살에 의한 방화이며, 검을 가진 백병전은 아니다. 한국인은 거북선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근거가 없고 또 화살을 쏘는데 거북선은 불리하기 때문에 전술상도 거북선의 참전은 의미가 없다. 거북선을 탄 이순신의 이미지는 한국인에 의한 날조다. 일본이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로 방침을 변경하자 조선군의 전략은 전혀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일본은 수송용이었던 배에 대철포를 갖추어 중요 지점에 포대를 세웠다. 이후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수군의 피해를 많이 내는 것만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아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그 후 이순신은 적전 도망의 죄로 부하가 없는 병사로 강등했다. 조선수군의 그 후의 전투는 모두 패전이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에 의한 사망에 의한 평화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체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조선은 중국에 정기적으로 성노예를 헌상하는 속국이었기 때문에 종주국인 중국이 체결한 평화조약을 지킬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평화 후에 귀국하는 일본군을 비겁하게도 배후에서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었다. 이상이 조선의 공식기록인 선조실록에 근거한 이순신과 일본군 전투의 개요다. 이순신의 행동은 어떻게 봐도 영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오히려 싸움의 약한 친필라이다. 한국인에 의한 역사의 날조가 얼마나 심한지 알 것이다.
@user-nf5lp5nq4h
@user-nf5lp5nq4h Жыл бұрын
정말 들으면 들을수록 새롭고 존경을 넘어 역사에 길이길이 칭송받으실 덕장~이순신 장군님!!! 현재 난국에 빠진 상황속에서 한산이란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납니다. 현정부와 여야 의원들이 한산을 관람하고 이순신장군님의 애민정신을 반의반큼이라도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user-lz8ip5cr8c
@user-lz8ip5cr8c Жыл бұрын
나는 귀하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이순신장군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존경하지 않습니다. 나는 손자병법을 1000번 이상 읽은 사람으로 병법에 의해서만 판단할 뿐입니다. 먼저,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이 세분과 이순신 장군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공히 단 한번의 전쟁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거나 항복 조인식을 하게 만든 레벨의 사람이고, 동시에 최고사령관들이었고, 이순신은 공적이 그 수준에 가려면 너무나 멀었으며 직책 또한 해군사령관에 미치지 못합니다(조선시대 때 수준은 육군의 보조세력이었지 별개로 존재하는 그 어떤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해군사령관보다 한참 못미치는 직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바로 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있었고 더 위에는 다른 통합 관찰사가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메이지유신 이후 해군을 맡은 사쯔마군벌이 일본에 해군 영웅이 없어 대타로 이순신을 해군 영웅으로 만들어서 1900년대 초 부터 매년 해군 수뇌부진이 진해 현충사를 방문하며 영웅으로 길러내는 짓거리를 했었는데, 일제를 추종했던 박정희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웅화 과정을 거칩니다. 이순신장군의 성격은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그야 말로 한 성깔하는" 사람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거룩한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유튜브에서 한산도 대첩이 다루어졌지요. 결과 일본은 수전을 금한다는 토요또미의 명령이 내려 왔구요. 학익진을 사용하지 않고 일자진을 사용해서 오는 적들과 T 자 형태로 이루어서 대치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시간만에 끝날 싸움이 3시간으로 늘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학익진을 대단한 작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를 할 때 학익진으로 적 6만명을 몰사시킵니다. 학익진을 포위 공격의 가장 기본적인 진법일 뿐입낟. 한산도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설치한 게 1593년 4월 1일로 기억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여러 트러블, 사단에 휘말려(아니면 만들어내는 바람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간 때는 1597년 7월 초로 저는 기억합니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워서 이상한 모습으로 통제사에서 계급없는 직책으로 내려올 때까지 만 4년도 더 경과합니다. 만 4년은 전쟁 중에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내가 이순신이었으면 한산도에 본영을 세우는 순간 전략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세웠을 것입니다. 1. 거제도를 점령한다. 한산도에 있으면 일본군도 견내량만 봉쇄하면 조선 수군은 적의 보급 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산도 바로 오른 편에 거의 붙어 있는 거제도를 점령하면 거제도에서 부산도를 직선으로 뻥 뚤린 바다를 통해 그대로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습니다. 거제도를 점령하려면 수군 중에 육군 역할까지도 해야 하는 오늘날의 해병대 병력을 2.5만명 정도 길러내야 합니다. 당시 이순신의 전라도에서의 위세, 종군하는 장군이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순신이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전함과 다른 함정을 만들어야 했었습니다. 함포는 뱃머리와 후미 정도에만 설치하고 대신 해병대 병력을 200명 승선시킬 수 있는 함정을 130척 건조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당시의 사거리가 가장 길었던 천자총통의 사거리 1Km 를 2Km 로 늘린 대구경 화포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적군들은 견내량이나 부산포에서 인근의 높은 산, 언덕 위에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곡사로 쏘면 1.3Kg 정도 사거리 나옵니다. 그래서 아군은 2Km 사거리가 필요했습니다. 직선 사거리는 200미터였는 데 직선 사거리 400미터로 화포를 개량해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승자총총은 세종대왕 시절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만든 무기로, 임란에 사용될 때는 만들어진 지 150년이 지났습니다. 마침 명나라에는 구경이 아주 큰 거대 화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차용하여 거대 화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2. 상기한 바와 같이 준비한 후, 거제도를 점령합니다. 해군, 해병대 협공. 3. 거제도를 점령하면 정탐당하지 않도록 거제도에 인접한 육지 지역을 총공격하여 싹 쓰러버려야 합니다. 이러면 적의 보급의 본거지인 부산포 공격 준비가 완료됩니다. 4. 마지막으로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배를 탐망하는 배를 띄워 온다면 연기로 신호를 하여 바다에서 요격해버리는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구원하려고 부산포에서 출격하면 그거야 말로 경사입니다. 5. 마지막으로 조선 육군, 명나라가 부산을 북쪽에서 밀고 내려가고 수군, 해병대가 바다에서 밀고 올라갔다면 이 전쟁은 안 보아도 척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93년 4월 1일 한산도에 수군통제영을 설치한 후 1597년 7월 초 통제사에 쫒겨날 때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귀하가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순신장군의 4년간의 방임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긋나니, 하는 시조는 읊조렸어도, 적의 심장에, 적의 간에 칼을 들이밀고 썰어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전란 중의 4년은 매우 깁니다. 나는 해병대 출신인데 2주일만 훈련소에서 훈련 받아도 눈에 뵈는 게 없는 해병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따라서 전란인 당대에 6개월만 훈련시키면 활, 검술, 창술, 조총술, 대포술, 항해술 등등을 대부분 마스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삼도수군 통제사 시절의 이순신의 4년, 정말 궁금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못한 이순신. 적의 본진을 매일 보기만 할 뿐 어쩌지 못한 이순신. 한계가 너무 큰 인물.
@user-nf5lp5nq4h
@user-nf5lp5nq4h Жыл бұрын
@@user-lz8ip5cr8c 참 구구절절 쓰셨는데 딱히 공감은 안가네요. ㅋ 왜 일까요? 그건 님이 아실듯~ 4년동안 보여준게 없다?는 코멘트는 압권이네요. 그당시에는 정전중이었고 작전권은 명나라에 있었어요. 더군다나 최악의 선조 밑에서 이순신장군이 독단적으로 할수 있는게 없으셨겠죠~ 전쟁에서 승리만을 취하는게 능사인가요? 님 말씀처럼 이순신장군은 정말 신중한 분이셨고 노량해전을 제외하고 모든 전투의 기본은 아군의 피해를 입지 않는 승리였어요. 그리고 수군의 참혹했던 그 시절에 해적들이 난무한 일본의 수군에 대항하며 남해와 서해를 지킨게 가장 큰 핵심이죠~ 그래서 보급품이 절실했던 일본이 의주에 있던 선조를 잡으러 못 간거죠~ 이순신 장군을 성웅화하면 안되나요? 왜요? 님께서 이순신 장군이셨다면 어찌저찌 한다고 자신감 표출했는데~과연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당신이 이순신 장군을 뛰어넘을 능력을 내보인다는 그 오만함에 참 불쌍하단 생각마저 드네요. 심지어 왕도 백성을 버리고 명으로 망명까지 하려 했던 그 시기에?? 이보세요~정신차리세요 병법서를 달달 외울정도 봤다고 모든걸 당신뜻대로 할거 같은 되먹지 못한 망상에서 벗어나세요~ 참으로 딱하시오 ㅋ ㅋ
@user-lz8ip5cr8c
@user-lz8ip5cr8c Жыл бұрын
@@user-nf5lp5nq4h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왕이 피란을 가는 것은 삼국시대 이래 하나의 전통입니다. 거란이 쳐들어왔을 때 강감찬만 주전론을 펼쳤고 나머지 전부 항복하자고 했습니다. 2차때는 왕이 안동인가로 피난갔고 3차때는 나주로 갈 예정이었는데 감강찬을 믿고 가지 않겠다고 해서 개경에 왕이 남은 희한한 케이스를 보여주지요. 그리고 강감찬의 귀주대첩을 한번 연구해보세요. 천문, 지리에 통달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전략을 펼칩니다. 나는 이순신장군이 나쁜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업적에 비하여 지나치게 과분하게 대우 받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해군의 프로젝트를 펼친 결과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이것도 역사이니 참인지 거짓인지 공부해보세요). 1593년 4월초 한산도에 대본영을 설치 한 후 무슨 작전을 하지 않았다고 욕하는 게 아니라 무슨 작전을 할 수 있는 역량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데서 나는 이순신장군에게 불같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작전권이 미국에 있는 대한민국, 군비를 늘리고, 훈련하는 것까지 미국 허락 받나요 ? 아울러 이순신 특유의 까칠한 성격으로, 이순신이 명나라의 명령을 듣는 스타일이었나요 ? 존경하는 인물도 머리부터 발꿑까지 이해한 다음 존경할 일이지 무턱대고. 대한민국에서 박정희가 집권한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역사인물 중 누구를 가장 영웅으로 만들었나요 ? (영화, 드라마, 기타). 이것도 세뇌의 일종입니다.
@user-nf5lp5nq4h
@user-nf5lp5nq4h Жыл бұрын
@@user-lz8ip5cr8c 이보세요? 관종이세요? 자기주장이 맞다고 본인이 아는 지식 총동원해서 쓰는것까진 이해하지만, 세뇌당했다? 그딴 표현으로 본인 주장을 관철하려 들지 마세요~딱해보임 ㅋ 성웅화되었다는 거 어느정도 인정하오만 당신이 이순신 장군을 폄하하는 논리가 딱해보이네요~~그냥 자기 잘났다고 자랑질하려는 모습으로 비춰지네요. 정말 안타까워서 말씀드립니다. 님 글이 탁상공론으로만 보이고 편협한 시각으로 비판이 아닌 그냥 이순신 장군 깍아내리려고 하는 딱 그 수준입니다. 나름 역사 공부 많이 했다는 자만에 빠져 잘난척 하시는 모습이 흡사 한동훈 같네요. 더이상 답변은 안합니다. 부디 거울을 보며 본인을 돌이켜 보시길~~
@tv-xp1bl
@tv-xp1bl Жыл бұрын
내용도 정말 유익하지만 황쌤의 신난 모습에 덩달아 힘이 납니다. 꼭 아이들이 자기 아빠 자랑하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감사합니다. 영화 곧 봐야겠네요.
@short_00700
@short_00700 Жыл бұрын
영화에 나오는 웅치전투를 보면서 선생님이 강의해주신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늘 멋진 역사 강 의 잘 듣고 있습니다!👍
@jskim8804
@jskim8804 Жыл бұрын
이순신 장군님의 전술.전략에 눈물이 나옵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jskim8804
@jskim8804 Жыл бұрын
@@hiroono1 네 이놈~~^^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jskim8804 조선인은 그렇게 일본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것이다.
@user-uk8kh2xs9u
@user-uk8kh2xs9u Жыл бұрын
엊그제 한산을 보고..선생님의 책..이순신의 바다를 오늘 받아서 읽기 시작했습니다..눈으로 대충보아도 풍부한 자료가 돋보이네요..특히 전투장면을 지형과 함께 삽화처리한 것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리고, 황선생님의 약력을 보니 전♡대를 나오셨군요..저도 그 대학 무역학과 85학번입니다..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강의 많이 부탁드립니다...저도 역사를 너무 좋아해서 역사를 전공할뻔 했던 사람으로, 황선생님의 힘있는 강의를 항상 응원합니다
@user-rn4wm6pp5n
@user-rn4wm6pp5n Жыл бұрын
역시 내가 존경하는 분들과 친분이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 금년에 환갑 입니다만은 선쌤을 역사공부을 하고 있읍니다 존경도 하고요~
@user-lj7xv3vc7k
@user-lj7xv3vc7k Жыл бұрын
방금 영화 보고 들어 와서 공부 중입니다. 영화 보면서 격군들의 활약이 크다고 느껐는데, 정말 어려운 일을 해내신 거였군요. 온 몸을 던져 나라를 지켜주신 선조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그분들의 후손께 큰 축복이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user-lz8ip5cr8c
@user-lz8ip5cr8c Жыл бұрын
나는 귀하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이순신장군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존경하지 않습니다. 나는 손자병법을 1000번 이상 읽은 사람으로 병법에 의해서만 판단할 뿐입니다. 먼저,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이 세분과 이순신 장군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공히 단 한번의 전쟁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거나 항복 조인식을 하게 만든 레벨의 사람이고, 동시에 최고사령관들이었고, 이순신은 공적이 그 수준에 가려면 너무나 멀었으며 직책 또한 해군사령관에 미치지 못합니다(조선시대 때 수준은 육군의 보조세력이었지 별개로 존재하는 그 어떤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해군사령관보다 한참 못미치는 직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바로 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있었고 더 위에는 다른 통합 관찰사가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메이지유신 이후 해군을 맡은 사쯔마군벌이 일본에 해군 영웅이 없어 대타로 이순신을 해군 영웅으로 만들어서 1900년대 초 부터 매년 해군 수뇌부진이 진해 현충사를 방문하며 영웅으로 길러내는 짓거리를 했었는데, 일제를 추종했던 박정희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웅화 과정을 거칩니다. 이순신장군의 성격은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그야 말로 한 성깔하는" 사람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거룩한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유튜브에서 한산도 대첩이 다루어졌지요. 결과 일본은 수전을 금한다는 토요또미의 명령이 내려 왔구요. 학익진을 사용하지 않고 일자진을 사용해서 오는 적들과 T 자 형태로 이루어서 대치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시간만에 끝날 싸움이 3시간으로 늘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학익진을 대단한 작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를 할 때 학익진으로 적 6만명을 몰사시킵니다. 학익진을 포위 공격의 가장 기본적인 진법일 뿐입낟. 한산도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설치한 게 1593년 4월 1일로 기억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여러 트러블, 사단에 휘말려(아니면 만들어내는 바람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간 때는 1597년 7월 초로 저는 기억합니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워서 이상한 모습으로 통제사에서 계급없는 직책으로 내려올 때까지 만 4년도 더 경과합니다. 만 4년은 전쟁 중에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내가 이순신이었으면 한산도에 본영을 세우는 순간 전략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세웠을 것입니다. 1. 거제도를 점령한다. 한산도에 있으면 일본군도 견내량만 봉쇄하면 조선 수군은 적의 보급 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산도 바로 오른 편에 거의 붙어 있는 거제도를 점령하면 거제도에서 부산도를 직선으로 뻥 뚤린 바다를 통해 그대로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습니다. 거제도를 점령하려면 수군 중에 육군 역할까지도 해야 하는 오늘날의 해병대 병력을 2.5만명 정도 길러내야 합니다. 당시 이순신의 전라도에서의 위세, 종군하는 장군이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순신이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전함과 다른 함정을 만들어야 했었습니다. 함포는 뱃머리와 후미 정도에만 설치하고 대신 해병대 병력을 200명 승선시킬 수 있는 함정을 130척 건조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당시의 사거리가 가장 길었던 천자총통의 사거리 1Km 를 2Km 로 늘린 대구경 화포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적군들은 견내량이나 부산포에서 인근의 높은 산, 언덕 위에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곡사로 쏘면 1.3Kg 정도 사거리 나옵니다. 그래서 아군은 2Km 사거리가 필요했습니다. 직선 사거리는 200미터였는 데 직선 사거리 400미터로 화포를 개량해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승자총총은 세종대왕 시절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만든 무기로, 임란에 사용될 때는 만들어진 지 150년이 지났습니다. 마침 명나라에는 구경이 아주 큰 거대 화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차용하여 거대 화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2. 상기한 바와 같이 준비한 후, 거제도를 점령합니다. 해군, 해병대 협공. 3. 거제도를 점령하면 정탐당하지 않도록 거제도에 인접한 육지 지역을 총공격하여 싹 쓰러버려야 합니다. 이러면 적의 보급의 본거지인 부산포 공격 준비가 완료됩니다. 4. 마지막으로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배를 탐망하는 배를 띄워 온다면 연기로 신호를 하여 바다에서 요격해버리는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구원하려고 부산포에서 출격하면 그거야 말로 경사입니다. 5. 마지막으로 조선 육군, 명나라가 부산을 북쪽에서 밀고 내려가고 수군, 해병대가 바다에서 밀고 올라갔다면 이 전쟁은 안 보아도 척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93년 4월 1일 한산도에 수군통제영을 설치한 후 1597년 7월 초 통제사에 쫒겨날 때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귀하가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순신장군의 4년간의 방임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긋나니, 하는 시조는 읊조렸어도, 적의 심장에, 적의 간에 칼을 들이밀고 썰어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전란 중의 4년은 매우 깁니다. 나는 해병대 출신인데 2주일만 훈련소에서 훈련 받아도 눈에 뵈는 게 없는 해병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따라서 전란인 당대에 6개월만 훈련시키면 활, 검술, 창술, 조총술, 대포술, 항해술 등등을 대부분 마스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삼도수군 통제사 시절의 이순신의 4년, 정말 궁금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못한 이순신. 적의 본진을 매일 보기만 할 뿐 어쩌지 못한 이순신. 한계가 너무 큰 인물.
@levi272108
@levi272108 Жыл бұрын
어제 한산도 보고 왔습니다. 50분간 전투신에서 진짜 박수치고 환호하고 싶었습니다. 황현필 선생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또 눈으로 볼 수 있어서 너무 실감나고 벅차 오르더군요.
@user-co1fj2lw5r
@user-co1fj2lw5r Жыл бұрын
저는 아직 영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는곳이 거제도라 오늘 칠천량해전공원 박믈관을 또 다녀왔습니다. 원균이 너무 원망스럽고 가슴아픈 역사인 현장이지만 전망대 전망은 너무 아름답고 섬이 정말 예쁩니다. 박물관구경은 같이간 개님때문에 영상이랑 다 둘러보질 못했는데요 담에 다시가서 보려구요. 늘 훌륭하신 강의 감사합니다.
@user-jh2ld2rp9l
@user-jh2ld2rp9l Жыл бұрын
황현필 님 유툽강의보고..한산 영화를 보니..감독의도가 보이고, 영화보는 재미가 4배는 되네요!!!감사합니다
@jhonneyKim
@jhonneyKim Жыл бұрын
카..감동의 눈물이 나오네. 잘 봤습니다.
@user-ge5yf7qm8t
@user-ge5yf7qm8t Жыл бұрын
한산 영화보고싶습니다 쌤 은 언제나 👍 일본서 살고있지만 한국인에 자존심은 강합니다 요즘은 케이 팝땜 더 한국인이 이라구 자랑할정도 ㅋ 일본친구중에 역사을 넘 좋아하는 친구가 한국에 역사속에 제일 존경하는 사람 이순신 이라했는데 이영화 꼭 보여주구싶네요 쌤 오늘도 좋은 해설 👍
@bbhar840
@bbhar840 Жыл бұрын
개봉날 한산 보고 왔습니다. 거북선 ㅜㅜㅜ 하... 박해일의 이순신도 너무 멋지더군요. 영화 보기 전 후로 선생님 한산 강의를 다시 봤었는데 ㅜㅜ 증말............ 가슴이 울렁 거릴 정도로.... 웅장합니다.
@user-gf1xi7vo2c
@user-gf1xi7vo2c Жыл бұрын
설명하신 내용과 영화 내용 싱크로율이 똑같아서 소름 돋았어여.
@user-qp3sl7xu8n
@user-qp3sl7xu8n Жыл бұрын
한방 쏵!!!!!!!!!
@user-ww3cr2jp8i
@user-ww3cr2jp8i Жыл бұрын
샘 유튜브 강의도 한국사 흐름 잘 잡아서 올해 지방직 필기셤 합격했어요 감사합니다 한개 틀렸는데ᆢ 그것도 아는걸 틀려서 짜증이😱😱 그래도 합격했으니ᆢ 괜찮아요ㅋ 샘 강의 진짜 좋아요 그냥 요점만 정리해주시니ᆢ 어느정도 베이스 있는 수험생이 정리할때 듣기 너무 좋아요 🥰🥰
@seeuamita
@seeuamita Жыл бұрын
분명 이순신 하나보고 싸운걸텐데, 부하들의 마음이 도망가지않고 죽음이란 두려움을 가슴으로 받아들인게 정말 놀랍습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user-hr6vp9bk3j
@user-hr6vp9bk3j Жыл бұрын
이순신 밑에 있으면 죽을리가 없으?니까요... 확률이 아주 적음...
@user-xx3xf5er5t
@user-xx3xf5er5t Жыл бұрын
강의 항상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선생님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user-xx3xf5er5t
@user-xx3xf5er5t Жыл бұрын
@@hiroono1 ㅋㅋㅋ 니가 하는 게 날조야 세계 4대 대첩 한산대첩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user-xx3xf5er5t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awesomeguy2352
@awesomeguy2352 Жыл бұрын
박수를 치며 영화를 보다가.. 거북선의 충파장면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Spike_cowboy
@Spike_cowboy Жыл бұрын
오전에 한산 보고왔는데 황쌤 역사강의 듣고 보니까 더 재밌었어요 일본군 노가 튼튼한 판옥선에 부딛혀 박살나는 것도 영상에서 말씀하셨고 나대용 고니시 이억기 등 아는인물이 나오니까 재미가 배가되네요…마지막에 웅치전투에서 황진장군 나오는거보고 소름돋았어요 쌤 아니었음 누구였는지도 몰랐을거고 웅치전투가 중요한지도 몰랐을거에요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user-vp3hs4qm2w
@user-vp3hs4qm2w Жыл бұрын
고니시가 나와요? 고니시는 그 당시 평양성에 있을것 같은대요? 암턴 역사왜곡 심하겠네요
@kfavorite4976
@kfavorite4976 Жыл бұрын
@@user-vp3hs4qm2w 영화를 보시고 댓글을 다시는게 좋겠어요.
@user-vp3hs4qm2w
@user-vp3hs4qm2w Жыл бұрын
@@kfavorite4976 불멸에 이순신 명랑 모두 역사왜곡 천지인데 그걸 왜? 봐요 이순신에 왜곡은 삼국지연 관운장 수준입니다 황제를 자리를 오르지 안았는데 황제칭호를 얻고 도교에 제물신이 관운장입니다
@Ryung69
@Ryung69 Жыл бұрын
에라이 매국노 이완용
@shlee1044
@shlee1044 Жыл бұрын
어제 어머니 모시고 아들과 함께 영화 한산 관람하고 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꼭 보시라고 추천드립니다..
@mademoiselle-valery
@mademoiselle-valery Жыл бұрын
Waiting for Hanson, Rising Dragon to come at local theaters in North Carolina! Thank you so much for wonderful lectures always.. and showing rugged coastline on the map really helped a lot! 😊감사합니다 😊
@jiwoongha6383
@jiwoongha6383 Жыл бұрын
영화 한산 너무나 재밌게 보았고, 감격스러웠고, 자랑스러웠습니다! 한산도 대첩이 있었던 7월8일! 영화 개봉도 7월이었네요! 강추 영화 입니다 감사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lovelyj9752
@lovelyj9752 Жыл бұрын
양력 8월 14일 오전에 한산도 대첩이 시작되었습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lovelyj9752 7월 7일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사카가 바보 같은 행동을 취했기 때문에 일본 수군이 패배하자 일본군은 출격 전술에서 수륙 공동 방어 전술으로 방침을 변경했다. 당초 독점적으로 수송용이었던 일본군의 배에도 대포가 갖추어져 일본군은 중요 거점에 포대를 쌓아 수륙병진해 활동하게 되었다. 이 방침전환은 유효하게 기능해, 이후의 이순신에 의한 일본측의 정박지에의 공격은, 부산포 공격, 구마가와 공격 등, 조선 수군의 피해를 많이 낼 뿐으로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 수군의 출격 횟수는 급감했다. 9월 1일 조선수군은 총력을 꼽고 부산의 탈환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으로 격퇴되어 패퇴하고 조선수군은 가시마 만도 정운이 전사하는 등 손해를 많이 내고 철수했다(부산포 해전). 그동안 연속적으로 출격을 반복해 온 조선수군은 이 싸움 이후 눈에 띄는 활동을 멈춘다. 드디어 활동을 재개하는 것은 이듬해 2월 쿠마가와에 대한 공격이다. 이순신이 부산에 나타난 것은 이때가 처음이고 마지막이 됐다. 이에 따라 부산은 일본군에 있어서 안타까운 장소가 되어 전쟁 종결까지 보급연락상의 근본 거점으로 계속 기능하게 된다. 이들 전투를 통해 조선측에도 일본측에도 거북선의 출동 기록은 전혀 없지만, 한국인은 거북선 3척이 사용되었다고 날조한다. 한산도 해전에서 조선측이 사용한 무기는 화살이며, 검에 의한 백병전은 없고, 철포도 사용되고 있지 않다. 접근전용인 거북선이 출동할 필요성이 원래 없는 것이다. 한국인의 거짓말은 분명하다.
@thisistheway2488
@thisistheway2488 Жыл бұрын
정말 감사합니다. 역사에 대해서 자부심있게 알려주셔서 영화도 보았지만 역시!!! 황현필 한국사가 잼있어요!
@user-rd5fj3wl1f
@user-rd5fj3wl1f Жыл бұрын
시원시원합니다. 늘 다음편은 무엇이나올지 궁금해집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데타라메 소설이 아니라 당시 기록된 문헌을 읽어 주세요. 이순신을 영웅이라고 쓴 문헌은 하나도 없다.
@user-fh6ez3hd6m
@user-fh6ez3hd6m Жыл бұрын
@@hiroono1 당시 기록된 문헌을 읽은건데.. 우리 일본친구는 소설이란 근거는 있나..?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user-fh6ez3hd6m 그 내용에 이순신이 일본의 큰 타격을 가했다는 설명은 없다. 이순신이 일본과 싸운 것은 며칠이며, 나머지는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나라끼리 화해한 뒤 비겁에도 배후에서 공격해 반대로 죽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조선 민중이 일본을 환영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 조선 인구가 20% 줄었다. 많은 민중들이 조선을 버리고 일본으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user-lc9kv3gd7w
@user-lc9kv3gd7w Жыл бұрын
명량 한산 노량 3부작이라고 합니다
@JKLEE-dc7lj
@JKLEE-dc7lj Жыл бұрын
하늘에서 이순신장군님을 낳아주시고 조선과 백성을 구해주셨네요 지금 살아감에 감사드립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JKLEE-dc7lj
@JKLEE-dc7lj Жыл бұрын
토착왜구 역사 왜곡 멈춰!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JKLEE-dc7lj 선조실록 등 당시의 기록을 읽어라. 한국인의 비디오가 데타라메라고 하는 사실을 알 것이다.
@user-om1eg7nf3m
@user-om1eg7nf3m Жыл бұрын
고려나 그 이전이면 모를까 조선이란 ㅂㅅ같은 나라는 진작에 망했어야 할 나라가 더 연명한것뿐 하늘이 도왔다고 하긴 좀 그러네요.. 이후 나라는 점점 산으로 가고 200년뒤 더 굴욕적으로 여기저기 털리고 식민지 생활도 하다가 남북 으로 갈라져서 내전에 ..
@user-bi7dn8oi4o
@user-bi7dn8oi4o Жыл бұрын
정말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님 조상님들 항상 감사합니다 흑흑 한산 보고 왔습니다 황현필 선생님!!!역사를 역사답게 ! 감사합니다 !!!!!
@sleepysong87
@sleepysong87 Жыл бұрын
황현필 선생님 오늘도 역사교육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우리역사 많이 알려주세요 선생님 회이팅
@esunkim5677
@esunkim5677 Жыл бұрын
가족들이 갔다 왔습니다. 전 미국에 있어서 이 영화 보려면 왕복 6시간 희생해야 합니다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어요. 서양인인 우리 남편, 한국 역사를 들으며 자란 저의 아이 모두 재밌는 영화라고 합창을 했어요. 뿌듯~ 아무래도 지식이 좀 있어야 더 재밌을 거 같아 이 영상을 남편과 아이에게 보여주기로 했어요. 황선생님 좋은 영상에 감사드려요.
@vanvan-gr2yc
@vanvan-gr2yc Жыл бұрын
황쌤 영상은 컴이나 폰으로보기보다는 거실의 대형 스크린으로 보면 더 좋아요. 지도나 사진도 잘 보이고 너무 좋습니다. 최고입니다. 이 나이에 다시 공부하니 너무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user-yn5qc7gs6l
@user-yn5qc7gs6l Жыл бұрын
한산 봤어요 ... 근데 이순신얼굴을 모르는데 왠지 박해일같아보였어요 내년애는 김윤식이 이순신역으로 나온다던데.. 잘 봤습니다
@crystalwing7833
@crystalwing7833 Жыл бұрын
오늘한산보고왔습니다! 교과서로배웠던 한산대첩을보면서 이순신장군에게 인간적 감동받고 왔습니다!ㅠㅠ 한산도대첩이 어떻게 승리하게 되었는지 승리의 이면에 나라를 구하고자 일어선 많은 민초들의 희생과 한 마음으로 작전을 수행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고 최선을 다했던 군인들....영화시간이 너무 짧게 느껴졌던 시간 이였습니다! 황현필선생님의 이 영상을 보고 다시 한번 보러 가려합니다~
@user-jo9mo7cm6b
@user-jo9mo7cm6b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황선생님, 호사카 유지 교수님.^^
@user-yu6jy9le2v
@user-yu6jy9le2v Жыл бұрын
황현필선생님의 강의는~ 보고보고 또 보고보고~~ 나의 최애 영상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영상 업로드 부탁드려요~^^
@user-bm8mi3rz3j
@user-bm8mi3rz3j Жыл бұрын
아이맥스로 영화보고 왔어요~해상전투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책[이순신의 바다]를 읽고 가서 그런지 영화가 더 잘 보이더라고요 😊 영화보고 나오는데 어떤 어린이의 말이 생생하게 들리더군요. "진짜 재밌어.어벤져스보다 4배는 재밌어" ㅋㅋ
@user-mh7fw4ts6b
@user-mh7fw4ts6b Жыл бұрын
어찌그리 강의를 맛깔스럽게 하시는지 황선생님 감사합니다
@c.h.s1471
@c.h.s1471 Жыл бұрын
개봉 다음 날 아침 조용히 혼자 가서 감동을 느끼고 왔습니다.너무 기다리고 있던 영화였고 말도 많았던 영화였기 때문이였기 때문에.선생님 임진왜란사 강의도 다듣고 갔었기 때문에 더 이해가 쏙쏙 되는 영화였던거 같았습니다.짧게 나왔던 웅치이치전투까지 짧게 짧게 아름다운 학인진까지 다음 노량해전이 기대되는 영화였습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user-ys7or9jb8i
@user-ys7or9jb8i Жыл бұрын
👍멋진강의잘보았어요~~현필쌤 우리도한산보러갈거에요가족들이랑
@shantishanti2233
@shantishanti2233 Жыл бұрын
이번주 휴가인데 이순신의 바다 읽으며 보낼려고 두권 구매했습니다 한권은 지인선물용! 많이들 구매 부탁드려요
@vc8884
@vc8884 Жыл бұрын
걍 너만 사라
@user-tm8lk4ps4m
@user-tm8lk4ps4m Жыл бұрын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user-dq9bl9iq6m
@user-dq9bl9iq6m Жыл бұрын
저도 또 샀습니다 ^^
@user-kt4qq1md2g
@user-kt4qq1md2g Жыл бұрын
한산보고와서 선생님 영상으로 궁금한거보다가 책도 구매해서 읽고있어요 책이랑 안친한데 앉아서 반절읽어내려갔어요 ㅎㅎ 너무재밌어요
@baegi.102
@baegi.102 Жыл бұрын
한산 영화에도 등장하는 웅치, 이치전투의 영웅 황진 장군도 재업로드 부탁드립니다 ㅎㅎ
@user-vs8qo3ny3g
@user-vs8qo3ny3g Жыл бұрын
황쌤의 이순신 장군 강의는 명품이라 하지 않을수 없으리오
@user-kt1ce2ub3i
@user-kt1ce2ub3i Жыл бұрын
왜 이리 눈물이 날까요....ㅜㅜ 장군님....
@user-cl5uw8zp2p
@user-cl5uw8zp2p Жыл бұрын
개봉하자마자 영화 보고왔는데 선생님 덕분에 더 재미있게 더 이해하기 쉽게 봤네요^-^ 항상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user-ow7mw1yh8b
@user-ow7mw1yh8b Жыл бұрын
거북선 나올때 박수나오고 눈물도 났습니다. 보실 분들 전쟁 중 눈물나게 되실 겁니다
@user-sc5iu2wm9w
@user-sc5iu2wm9w Жыл бұрын
나는 거북선이 3대 나오길래, 2대 아니었어??? 이랬음
@Spike_cowboy
@Spike_cowboy Жыл бұрын
@@user-sc5iu2wm9w ㄹㅇ
@fgk6974
@fgk6974 Жыл бұрын
이순신 장군님. 감사합니다. 황선생님 영상보면서 다시금 그 은혜를 느낍니다. 이런 영상 만들어주신 황선생님 또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훌륭하십니다....
@user-xy8vu3eu9k
@user-xy8vu3eu9k Жыл бұрын
오늘 가족들이랑 한산 보고 왔습니다. 영화 보고와서 이 영상을 다시 보니 이해가 더 잘 되네요...
@user-nq6cs9rr6w
@user-nq6cs9rr6w Жыл бұрын
1년전 임진왜란 다루실때 수십번 봤는데...한산이 대박인가봐요.
@parkboriiii
@parkboriiii Жыл бұрын
아니 현대적인 함선으로도 1면 학인진을 구사하기 어렵다는데... 저때 당시 판옥선으로... 그것도 저당시 통신체계로 3면 학익진이라니... 진짜 무슨 반지의제왕보다 더 판타지같음..
@user-ny9pj6bo8p
@user-ny9pj6bo8p Жыл бұрын
영화 한산 참고해서 잘 볼게요 감사합니다 황현필 샘 응원합니다
@user-nk3ef9pd8b
@user-nk3ef9pd8b Жыл бұрын
최소2번을 봐야할듯요ㅎㅎ 영화보는내내 황샘이랑같이보는듯했어요^^
@dawn_dew
@dawn_dew Жыл бұрын
임진왜란 시리즈 보고 팬 되었습니다 역사를 가장 역사답게 가르쳐주시는 황현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user-ji3qe3cn6j
@user-ji3qe3cn6j Жыл бұрын
선생님 책이랑 한산 영화 때문에 일본인들 여기와서 발악을 하네요
@dawn_dew
@dawn_dew Жыл бұрын
@@hiroono1 전라도에는 양반정치가 없어서 점령 못 했을까요? 이순신은 양반이 아니어서 민중들이 협조했나요? 님의 주장대로라면 조선민중들은 양반정치에 진절머리 났을 텐데 의병은 무엇하러 했을까요? 정유재란 때 왜군들의 잔혹성을 안다면 이런 주장하기 민망할 것입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dawn_dew 흥분하고 얼굴을 붉게 하지 않고 냉정하게 생각하십시오. 일본의 첫 목적은 서울의 함락이었고, 3주 만에 쉽게 실현되었다. 거의 10만명의 일본군이 부산에서 서울로 진군하기 위해서는 식량조달로 조선인 민중의 협력이 필수적인 것은 한국인이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군에 있어서 조선은 미지의 토지이며, 그 의미에서도 조선인의 길 안내가 불가결하다. 3주간이라는 시간이 조선군의 무력함을 증명하고 있으며, 서울에 이른 10만명이라는 일본군의 수가 조선 민중의 협력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 종료 후 많은 조선인이 일본으로 귀화했다. 이에 따라 조선 인구는 20% 줄었다고 한다. 이것도 조선인이 일본군을 환영한 증거이다.
@dawn_dew
@dawn_dew Жыл бұрын
@@hiroono1 흥분하지 마시고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기 바랍니다 조선인들이 많이 끌려갔지요 대분분이 자율적인 귀화가 아니었던 것을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그리고 전쟁 후 조선인이 20퍼센트나 줄었다는게 귀화의 근거라니 논리 비약이 심합니다 무슨 이익을 위해서 역사왜곡에 앞장서시는지요 안쓰럽습니다 힘내세요
@user-gu1fw3ft6s
@user-gu1fw3ft6s Жыл бұрын
바다에서 진을 구성하여 작전을 한다는것 자체가 정말 많은 훈련과 노력으로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 하 신뢰가 있어야 이런 것도 가능하겠죠!!
@namu7379
@namu7379 Жыл бұрын
좋은 영상 감사드립니다. 영화를 본 후 궁금했던 것들을 가장 잘 정리해주셨네요 ^^ 최고~~!
@user-tk7bw8ob2d
@user-tk7bw8ob2d Жыл бұрын
한산도대첩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ㅎㅎ
@user-uz9yz1kl3z
@user-uz9yz1kl3z Жыл бұрын
한산 보고왔습니다. 미술감독에 섬세함에 놀랐습니다. 옥에 티가없을정도로 장치,의상(특히 일본군 의상들) 들이 풍요로웠습니다~~ 세심하게 신경썼씀이 보입니다~~~
@raphaellee2878
@raphaellee2878 Жыл бұрын
이제 한산 보러 갑니다 선생님 😆😆 황현필 화이팅!!
@user-tl9zx6bf7h
@user-tl9zx6bf7h Жыл бұрын
강의 정말 잘 듣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user-dc5dw3yi7m
@user-dc5dw3yi7m Жыл бұрын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reviewbear
@reviewbear Жыл бұрын
저는 이순신 장군을 가장 존경해서 여행 중에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보이면 무조건 가고, 일부러도 찾아가곤 합니다. 는 당연히 구매해서 보고 있구요.ㅎㅎ(책의 퀄리티가 장난이 아닙니다.^^) 오늘 영화보고 와서 다시 이 영상을 보고 댓글 남기네요. (일본어 자막이 추가되어서 일본사람들도 이 역사를 알 수 있을것 같아서 개인적으로 정말 좋네요.ㅎㅎ) 황현필 선생님의 영상을, 특히 임진왜란 영상을 여러번 봐서인지, 영화보는 내내 왜놈들의 이름이 낯익어서 이해가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영상을 봤었기 때문에 영화에서 나온 웅치전투도 어떤 의미인지도 알 수 있었구요.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든 영상, 정말 감사합니다~
@aa87740521
@aa87740521 Жыл бұрын
학익진은 누구나 할수 있는게 아니었다. 이순신장군의 학익진은 엄청난 훈련의 결과였다. 이순신장군의 수군은 당시 세계최고의 수군이였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user-lz8ip5cr8c
@user-lz8ip5cr8c Жыл бұрын
학익진은 진법의 기초에 속함.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에서 로마군 6만을 몰살시키는 데도 움직이면서 전투 중에 학익진을 만들어 내서 쓸어버린 것임. 학익진보다 더 좋은 게 "하나의 살 길만 만들어 놓은 포위진" 임. 나는 귀하께서 생각하는 것처럼 이순신장군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존경하지 않습니다. 나는 손자병법을 1000번 이상 읽은 사람으로 병법에 의해서만 판단할 뿐입니다. 먼저,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이 세분과 이순신 장군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강감찬 공히 단 한번의 전쟁으로 상대방을 궤멸시키거나 항복 조인식을 하게 만든 레벨의 사람이고, 동시에 최고사령관들이었고, 이순신은 공적이 그 수준에 가려면 너무나 멀었으며 직책 또한 해군사령관에 미치지 못합니다(조선시대 때 수준은 육군의 보조세력이었지 별개로 존재하는 그 어떤 군대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해군사령관보다 한참 못미치는 직책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바로 위에는 전라도 관찰사가 있었고 더 위에는 다른 통합 관찰사가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메이지유신 이후 해군을 맡은 사쯔마군벌이 일본에 해군 영웅이 없어 대타로 이순신을 해군 영웅으로 만들어서 1900년대 초 부터 매년 해군 수뇌부진이 진해 현충사를 방문하며 영웅으로 길러내는 짓거리를 했었는데, 일제를 추종했던 박정희에 의해 본격적으로 성웅화 과정을 거칩니다. 이순신장군의 성격은 제가 조사해본 바로는 "그야 말로 한 성깔하는" 사람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거룩한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이 유튜브에서 한산도 대첩이 다루어졌지요. 결과 일본은 수전을 금한다는 토요또미의 명령이 내려 왔구요. 학익진을 사용하지 않고 일자진을 사용해서 오는 적들과 T 자 형태로 이루어서 대치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결과는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시간만에 끝날 싸움이 3시간으로 늘어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학익진을 대단한 작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니발이 칸나에 전투를 할 때 학익진으로 적 6만명을 몰사시킵니다. 학익진을 포위 공격의 가장 기본적인 진법일 뿐입낟. 한산도에 삼도수군 통제영을 설치한 게 1593년 4월 1일로 기억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여러 트러블, 사단에 휘말려(아니면 만들어내는 바람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간 때는 1597년 7월 초로 저는 기억합니다. 한산도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세워서 이상한 모습으로 통제사에서 계급없는 직책으로 내려올 때까지 만 4년도 더 경과합니다. 만 4년은 전쟁 중에는 매우 긴 시간입니다. 내가 이순신이었으면 한산도에 본영을 세우는 순간 전략 목표를 다음과 같이 세웠을 것입니다. 1. 거제도를 점령한다. 한산도에 있으면 일본군도 견내량만 봉쇄하면 조선 수군은 적의 보급 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산도 바로 오른 편에 거의 붙어 있는 거제도를 점령하면 거제도에서 부산도를 직선으로 뻥 뚤린 바다를 통해 그대로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습니다. 거제도를 점령하려면 수군 중에 육군 역할까지도 해야 하는 오늘날의 해병대 병력을 2.5만명 정도 길러내야 합니다. 당시 이순신의 전라도에서의 위세, 종군하는 장군이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순신이 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전함과 다른 함정을 만들어야 했었습니다. 함포는 뱃머리와 후미 정도에만 설치하고 대신 해병대 병력을 200명 승선시킬 수 있는 함정을 130척 건조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그 당시의 사거리가 가장 길었던 천자총통의 사거리 1Km 를 2Km 로 늘린 대구경 화포를 개발해야 했습니다. 적군들은 견내량이나 부산포에서 인근의 높은 산, 언덕 위에 대포를 설치했기 때문에 곡사로 쏘면 1.3Kg 정도 사거리 나옵니다. 그래서 아군은 2Km 사거리가 필요했습니다. 직선 사거리는 200미터였는 데 직선 사거리 400미터로 화포를 개량해야 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사용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황자총통, 승자총총은 세종대왕 시절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만든 무기로, 임란에 사용될 때는 만들어진 지 150년이 지났습니다. 마침 명나라에는 구경이 아주 큰 거대 화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차용하여 거대 화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2. 상기한 바와 같이 준비한 후, 거제도를 점령합니다. 해군, 해병대 협공. 3. 거제도를 점령하면 정탐당하지 않도록 거제도에 인접한 육지 지역을 총공격하여 싹 쓰러버려야 합니다. 이러면 적의 보급의 본거지인 부산포 공격 준비가 완료됩니다. 4. 마지막으로 대마도에서 건너오는 배를 탐망하는 배를 띄워 온다면 연기로 신호를 하여 바다에서 요격해버리는 작전을 전개해야 합니다. 구원하려고 부산포에서 출격하면 그거야 말로 경사입니다. 5. 마지막으로 조선 육군, 명나라가 부산을 북쪽에서 밀고 내려가고 수군, 해병대가 바다에서 밀고 올라갔다면 이 전쟁은 안 보아도 척입니다. 이순신장군은 1593년 4월 1일 한산도에 수군통제영을 설치한 후 1597년 7월 초 통제사에 쫒겨날 때까지 4년이 넘는 기간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귀하가 아는 게 있다면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순신장군의 4년간의 방임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긋나니, 하는 시조는 읊조렸어도, 적의 심장에, 적의 간에 칼을 들이밀고 썰어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전란 중의 4년은 매우 깁니다. 나는 해병대 출신인데 2주일만 훈련소에서 훈련 받아도 눈에 뵈는 게 없는 해병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따라서 전란인 당대에 6개월만 훈련시키면 활, 검술, 창술, 조총술, 대포술, 항해술 등등을 대부분 마스터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삼도수군 통제사 시절의 이순신의 4년, 정말 궁금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못한 이순신. 적의 본진을 매일 보기만 할 뿐 어쩌지 못한 이순신. 한계가 너무 큰 인물.
@user-gd2wf2ek5x
@user-gd2wf2ek5x Жыл бұрын
어제 집사람이랑 한산 보고 왔습니다 마지막 전투씬...판옥선이 함포쏘고 나올때 진짜 전율이 오더군요 조상님들 진짜 감사합니다
@user-nt4bq5xk8v
@user-nt4bq5xk8v Жыл бұрын
감사합니다!
@user-vu3uf4cz9d
@user-vu3uf4cz9d Жыл бұрын
한산 보러 가야겠네요 강의 들으며 학익진 부분에서 소름~👍
@user-vu3uf4cz9d
@user-vu3uf4cz9d Жыл бұрын
근데 영화는 그닥 재밌진 않네요 스토리도 긴장감이 없고 전투장면도 기대했던 전율은 없었어요^^;
@user-qm2qi2ei6p
@user-qm2qi2ei6p Жыл бұрын
일본어 자막이 있군요. 황 선생님이 집필하신 (이순신의 바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이 일본에서도 많이 유명해지기를 바랍니다. 이번 영상도 잘봤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user-psychefilm
@user-psychefilm Жыл бұрын
오늘 한산을 보고 오면서 느낀건 암울한 조선시대에 최고의 장군이 있었음을. 그리고 선조는 나라를 등지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도망쳤지만.. 앞뒤 안보이는 선실에서 죽을 힘을 다해 노를 저었을 우리 선조님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음에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user-fm7rg9fh3c
@user-fm7rg9fh3c Жыл бұрын
위대한 백성들이죠
@user-gz9er3il3l
@user-gz9er3il3l Жыл бұрын
이순신 장군은 조선 최고의 장군만이 아닌 세계적으로 최고의 위대한 장군이었지요. 세계 어느 역사에 해전에서 23전 23승이란 해군 전쟁 역사가 있습니까?
@user-yl5cf1bo3p
@user-yl5cf1bo3p Жыл бұрын
금요일 퇴근후 영화 봤는데 잘 봤습니다. 재밌었어요.
@user-hu2kh9bn5e
@user-hu2kh9bn5e Жыл бұрын
선생님, 현장감 넘치는 강의에 지려버렸습니다..
@quietly_reciting
@quietly_reciting Жыл бұрын
존경하는 선생님의 책 이순신의바다! 저도 시의적절하게 낭독영상 제작해서 올렸습니다!! 🥹
@user-yz4gq1px2o
@user-yz4gq1px2o Жыл бұрын
황선생님... 이순신의 바다 일본어판 구매 가능할까요? 그래도 전공이 일본문학과 일본어교육학인데 한권 소장하고 싶네요...^^
@kokoko6009
@kokoko6009 Жыл бұрын
영상 신나게 봤네요. 마음이 뭉클뭉클 한국인의 자존심이 살아납니다
@TheEuropa9
@TheEuropa9 Жыл бұрын
재업하신 내용도 다시봅니다!!! 감사합니다. 쌤!
@RogerJSkim
@RogerJSkim Жыл бұрын
영화만큼 재밌고 유익합니다. 좋네요.
@flex5868
@flex5868 Жыл бұрын
이번 영화 한산에서도 실제 전투의 모습이 다 구현된 것은 아니군요. 좋은 컨텐츠 너무 감사합니다. 선생님. 짱짱.
@user-cj4tj2gu5z
@user-cj4tj2gu5z Жыл бұрын
들어도 들어도 역사 자체가 영화고 영화가 개봉되었네요~!!! 감사합니다.
@saxophoneland
@saxophoneland Жыл бұрын
오늘 한산 보고왔습니다. 영화내용과 다른 자세한 전황과 뒷얘기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deliciousfoods8694
@deliciousfoods8694 Жыл бұрын
_이순신!!!_ _이름만 들어도 설레인다 👍_
@user-js1rg4cv9p
@user-js1rg4cv9p Жыл бұрын
강의 넘 재밌게 잘들었습니다^^
@MKHan-qe8pd
@MKHan-qe8pd Жыл бұрын
영상 고맙게 잘 시청했습니다. 구독자 100만 명 가즈아~~
@jamesjeon4971
@jamesjeon4971 Жыл бұрын
우와! 일어 자막까지! 완전 멋집니다. 선생님의 멋진 강의를 일본인들이 보고 많은 반성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멈추십시오. 옥포해전에서는 조선이 일본의 수송선을 기습했다. 전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멀리서 화살로 불을 낸 것이다. 이순신은 일본의 배에 다소의 손해를 가했지만, 그 후 일본군이 와키자카군(동원정수 1500명), 구귀군(동원정수 1500명), 카토군(동원정수 750명)을 배치해 배에 대포를 장비하게 되면 조선수군은 피해를 많이 낼 뿐 성과가 오르지 않게 되어 조선수군의 출격횟수는 격감했다. 일본 측에 8000~9000명의 피해? 전혀 데타라메이다. 그 후 이순신은 전투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도망쳤기 때문에 좌천되어 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이 역사상 사실이다. 이순신은 대군을 상대로 한 것도 아니고, 대승한 것도 아니다. 초기에 작은 싸움에 몇 번만 이기고, 그 후에는 지는 계속해서 많은 조선인 병사를 잃었다. 그리고 전쟁의 끝에, 나라끼리가 화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일본군의 배후로부터 공격해, 반대로 살해된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이다.
@hiroono1
@hiroono1 Жыл бұрын
이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것은 단 며칠 만에 그 후에는 도망쳤다. 그래서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보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정말 일본군에 직면했다면 일본의 행군은 좀 더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화해가 성립해 일본군이 철수하자 이순신은 비겁에도 배후부터 일본군을 덮쳐 반대로 총격을 받고 죽은 것이다. 이순신은 쓸모없는 남자였다. 원래 일본의 행군을 조선민중은 환영했다. 음식도 제공했다. 민중은 조선 양반의 정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10만 대군이 불과 3주 만에 서울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군의 도중에 싸우고 있으면, 아주 그런 단기간에 서울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조선왕은 왕궁에서 도망쳤을 때 일본군이 아닌 조선인민중이 돌을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인은 역사의 날조를 중지하고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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