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후백제 최후의 날, 일리천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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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사적돌 KoreaHistoryTravel

역사여행 사적돌 KoreaHistoryTravel

Күн бұрын

Пікірлер: 112
@lrqa_jhk
@lrqa_jhk 7 ай бұрын
볼때마다 전쟁사나 군사학적인 식견에 놀랄따름입니다 😊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좋은말씀 감사드립니다. 더욱 공부하겠습니다😌
@user-ki4er4yf7r
@user-ki4er4yf7r 7 ай бұрын
매번 감탄합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시청 감사드립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tomandtrip
@tomandtrip 7 ай бұрын
자기가 세운 나라를 자기 손으로 무너뜨리는 견훤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컸을지 흥미로운 이야기 고맙습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고려군진영에 서있는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돌았을것 같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hawk8873
@hawk8873 7 ай бұрын
그러게요, 창업 군주가 적장자가 이은 나라를 스스로 멸망시킨 사례는 세계 역사상 뒤져봐도 극히 드문 사례라 흥미롭습니다. 암튼 견훤은 시대가 낳은 영웅임은 분명합니다. 호랭이 기운이 솟아요~
@user-ht4cf5ux9j
@user-ht4cf5ux9j 7 ай бұрын
선산 옆 고아읍이 고향인데 오랜만에 고향을 보니 반갑네요. 어릴 때 듣기로는 고아읍쪽에 후백제가 진을 쳤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고아읍쪽에는 관련 지명도 남아있구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오 생생한 덧글 감사드립니다😌 무척 신기하네요😄
@user-nn4rv4tu7t
@user-nn4rv4tu7t 6 ай бұрын
고아시군요 고아옆 봉곡동 삽니다 반갑습니다
@hawk8873
@hawk8873 7 ай бұрын
아휴, 감사합니다. 선산 일리천은 한번 직접 가보고도 싶었는데 이렇게 영상으로나마 볼 수 있네요. 최대 17만명이 격돌한 역사의 현장 치고는 지나치게 전장이 협소해서 논란이 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워낙 사료가 명확하고 횡대가 아닌 종심 깊은 종대로 격돌했다면 그럭저럭 가능은 했을듯 합니다. 어떤 글에서는 견훤의 군기를 확인한 견신검이 호족군의 동요와 이탈을 막기 위해 자신이 지휘하던 중군과 진형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워낙 비좁은 곳이라 이게 가능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론 고려군의 중군 3만 5천, 좌우군 2만, 유격군 만오천, 도합 10만에 육박하는 대군이였고 후백제군은 3만이였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마 상당수 후백제 호족군이 견훤의 등장에 동요하면서 전열을 이탈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유격 기병을 지휘한 고려 2대왕 혜종, 왕무 태자가 직접 후방으로 우회 공격을 하였고 팔에 화살을 맞았지만 전투 끝까지 지휘해서 승리를 이끌었다고 알고 있는데 지형이 저러면 기병을 이용한 후방 우회 공격도 매우 힘들어 보입니다. 발해는 당에서 일방적으로 부른 국호일뿐이고 정식 국호가 고려였기 때문에 만주 고려, 한반도 고려라는 식으로 서로에 대한 동족 의식이 있었는지 왕건은 지속적으로 귀부하는 발해 유민들을 전부 포섭했었죠.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오 자세한 덧글 감사드립니다😄
@user-yf4ph9py4e
@user-yf4ph9py4e 7 ай бұрын
정식 국호가 고려라는 기록은 없고 왜에 보내는 문서를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있죠. 다만 다른 외교문서를 살펴보면 발해 왕이 자신의 나라를 발해라고 칭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또한 고려의 삼국유사를 보면 발해를 진단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발해에 대한 최초의 역사서 발해고에서도 발해는 '발해'입니다. 고려라고 자칭한것은 아마 님이 아는 그 몇가지가 끝일겁니다. 민족주의없이 역사 없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의 테두리에서 생각합니다.
@lIlIllIIlIlIlllIIlI
@lIlIllIIlIlIlllIIlI 6 ай бұрын
30만이 격돌한 귀주평원도 선산 일대와 지형이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user-jg9gx2op6i
@user-jg9gx2op6i 6 ай бұрын
너무 훌륭합니다 감사합니다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시청 감사드립니다😌😄
@user-de7rt9nc2n
@user-de7rt9nc2n 6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오 시청 감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user-tr3hf6or8r
@user-tr3hf6or8r 7 ай бұрын
저번에 설명해주신 덕에 낙산리 설에 보다 감천을 두고 대치한게 맞는 것 같습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냉산이 태조산이기도해서 뭔가 있을것 같긴한데 사료가 제한적이라 아쉽습니다😞 전투전 양측이 전초를 보내 유인하면서 싸울자리를 정하는 기동을 했을텐데 낙동강 동안에서 군대 이동이 많이 제한적인듯합니다, 송곡리와 송암천도 고민했는데, 여기는 아예 자료가 없네요🤔 아직까지는 감천이 들어맞는게 가장 많은것 같습니다😌
@user-qt1gx6rc3y
@user-qt1gx6rc3y 7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후원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촬영해 오겠습니다
@user-qg3qh1rd7e
@user-qg3qh1rd7e 7 ай бұрын
솔직히 고창 전투에서 유금필의 활약과 고창지역의 호족들에게 도움을 받지 않았으면 쉽게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듯 합니다 공산 전투에서 크나큰 패배를 당하고 고창 전투까지 질질 끌려가다 고창전투에서 승리이후 고려가 후백제를 앞서기 시작했고 일리천 전투 이전에 후백제 견훤의 실수로 조선판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결국 고려로 망명 한뒤로 일리천 전투에서 직접 견훤도 참전하여 후백제의 항복을 받아냈지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후계자문제는 정치적으로 접근했어야합니다.. 전례가 있었는데도 왜 고집하다가..😞
@hawk8873
@hawk8873 7 ай бұрын
@@사적돌 /아마 견신검은 부왕의 뜻이니,,, 하면서 받아들인것 같은데 동생인 견양검, 용검은 절대 용납을 못한듯 하며 특히 금강이 후처 고비 부인 소생이라 파가 갈려버린게 가장 큰 문제였던것 같습니다. 결국 호족들도 후계자 문제로 둘로 갈라져서 내분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워낙 견훤이 강력한 카리스마가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를 통하지 않고는 그 구도를 뒤엎을 수 없었죠. 결국 금강 태자는 살해 당하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되었지만 그 성격 어디 안가서 탈출하여 불구대천의 숙적, 왕건에게 투항하고 심지어 선산 전투에서는 자신의 부하와 자식들에게 칼을 들이대는 일까지,,,그래서 인지 황산에서 포로가 된 견신검은 처형 당하지 않고 양검, 용검과 능환등 주요 인사들만 처형당했다는 기록을 보면 견신검은 쿠데타에도 소극적이였고 아마 견훤의 대는 잇게 해주려는 왕건의 배려가 아니였을까 싶기도 합니다. 세계사에서도 자기가 나라 세우고 자기 손으로 나라 무너뜨린 거의 유일한 군주가 견훤 아닌가 싶습니다. ㅋ
@manson0116
@manson0116 7 ай бұрын
자식들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되고 본인이 만든 나라를 본인이 직접 무너 뜨리는 그 심정..헤아리기 어려울듯 합니다. ㅜㅜ 항상 고퀄의 영상 잘봤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후원감사드립니다😌😄 견훤은 최후의 모습 때문인지 유독 안타까운것 같습니다🤔
@user-eh9xx2bn5y
@user-eh9xx2bn5y 7 ай бұрын
고려와 후백제는결국에는 어느국가가 호족세력의 힘과마음을얻는 대한결과 란 생각이듭니다 후백제가 폐한고창전투가 그런한것처럼 또한 발해유민들이 고려에귀부하지않아 다면 일리천전투가 있지않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후백제의45년 치세를무시못하기에 늘멋진영상 감사드립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후백제가 백성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던것을 보면, 견훤이 발해유민을 흡수하지 못한것이 안타깝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려요😌
@Nut830
@Nut830 7 ай бұрын
선산에 사는 학생입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좋은 정보네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오 선산은 역사의 고장이지요😄
@TV-bq8pm
@TV-bq8pm 7 ай бұрын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시청 감사드립니다😌
@teacherdo9078
@teacherdo9078 5 ай бұрын
저도 냉산이 태조산으로 알고있는데, 문화해설사분께서 송당정사 쪽 산도 태조산이라 하더라구요, 그래서 감천을 두고 대치한게 맞는거 같아요. 고아읍의 지명도 왕건이 승리후 높은 곳에 깃발을 꽂은 아성이라는 것을 보면요.
@사적돌
@사적돌 5 ай бұрын
고아읍에 견훤을 무찔렀다해서 어견,정견 이라는 지명도 있다 들었네요, 아무래도 그 인근이 맞을것 같습니다😮
@user-yd5px5iw9y
@user-yd5px5iw9y 7 ай бұрын
멋지시네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시청 감사드립니다😌😄
@wodhun
@wodhun 6 ай бұрын
인스타 통해서 넘어왔는데,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구미 출신인데, 고향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 더 재밌게 봤습니다. 양쪽의 퇴로를 생각하면 낙동강을 두고 동서로 대치한 것 보다 감천이나 대망천을 두고 대치한 것이 합리적이고, 대망천 부근은 땅은 너르지만 유역이 작아 아닌 것 같아 감천이 유력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영상내용과 결이 비슷해서 신기하네요. 감천이 범람이 잦아 당시엔 지류가 어땠을진 모르겠지만요.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오 덧글 감사드립니다😌 고아에 견훤관련 지명이 내려오고 있다네요, 제일 근접하지 않나 싶습니다
@user-rm1xz8kr9p
@user-rm1xz8kr9p 5 ай бұрын
동양 전사는 서양 전사처럼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아, 그 양상을 기타 기록과 추측으로 판단해나가야 한다는게 참 아쉽습니다. 하지만, 영상에서 풀어주신 내용들처럼 합리적인 상상과 근거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들을 찾는 재미와 희열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영상 제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적돌
@사적돌 5 ай бұрын
산으로 가지 않기위해 정식으로 제시된 의견에서 참조하고 있습니다😌 많이 조심스럽네요, 시청 감사드립니다😄
@user-pposilagi
@user-pposilagi 2 ай бұрын
아쉽지만 병력규모나 사이즈가 동양전사가 큰편이라 자세하게 기록하기 힘든부분도 있지 않나 싶네요
@user-yc2hg4pq4s
@user-yc2hg4pq4s 7 ай бұрын
논란이 많지만, 스케일 측면에서도 역대급 전투였고, 후삼국의 대미를 장식하며 진정한 삼한일통의 기틀을 닦아낸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기승전결이 확실한 후삼국 전쟁사지요,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합니다😄
@rickykim4621
@rickykim4621 6 ай бұрын
저의 외갓집이 낙산1리(대문간) 석탑 바로 앞인데, 영상에 등장하네요. 놀랍고 신기합니다.🎉😮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오 낙산리는 고대 신라의 세거지로 역사적인 장소이지요, 유서깊은곳에 거주하시네요😄
@user-zv2xv4lc2h
@user-zv2xv4lc2h 7 ай бұрын
와 그 시대 그 시절 한번 돌아가보고 싶다 ㅎ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저도 꼭 가보고 싶네요 가볼곳이 너무 많습니다😄
@contiguous1
@contiguous1 7 ай бұрын
@@사적돌 대구 죽곡산에 무슨 삼국시대의 산성이 발굴 되었다고 하는데 거기도 시간을 내셔서 왕림해 주세요 ㅎㅎ
@user-bp3el6ql6t
@user-bp3el6ql6t 7 ай бұрын
겨울이라서 많이 춥지만, 더운 여름보다 산에 다니기는 더 나을 것 같아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지형이 드러나서 답사다니기도 좋지요😄
@user-mf2dd9eq3j
@user-mf2dd9eq3j 7 ай бұрын
사극 태조왕건에서 일리천전투를 너무 대충다뤄준게 참..ㅎㅎ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분명 봤을텐데 기억이 안나는것보면...ㅎㅎㅎ
@Fox_Mulder_
@Fox_Mulder_ 6 ай бұрын
80회차로 끝났어야 될 궁예왕이 등장하는 씬이 120회차까지 늘어나서 아마 그 이후에 촬영씬이 많이 축소될 수 밖에 없었을 것 같네요.ㅎ
@hahnskang4816
@hahnskang4816 6 ай бұрын
역사를 사극으로 배우나?
@user-qi1lc1ee3n
@user-qi1lc1ee3n 6 ай бұрын
😢😢😢😢😢😢​@@사적돌
@TheJinNK
@TheJinNK 7 ай бұрын
전에 어디서 본글인데 삼국통일 이전부터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서부는 인구가 고스란히는 아니어도 많은 수가 그대로 잔존했을거라고 하더군요 한강 유역은 풍납토성을 축조할만큼 원래부터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고 , 황해도도 고려초기 기록을 보면 고구려로 부터 비롯된 많은 호족들이 있던걸 보면 강원도 산악지역을 제외하면 최소 후백제와 인구는 비등했다고 보여지네요 왕건이 견훤에게 공산전투에서 궤멸적인 패전을 당하긴 했지만, 재기할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사족이지만 요즘 핫한 양규는 발해의 양씨 유민이거나, 황해도에 원래부터 있던 고구려계 안악 양씨 같은데 (어차피 둘다 고구려계이긴 합니다 ; ) 발해의 유민 출신이거나 황해도 출신이라면 끝까지 포로를 구출하려고 했던게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저도 양규는 고구려계로 인식하고 있었네요, 기병을 이끌어 종회무진한것보면 피는 속일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hawk8873
@hawk8873 7 ай бұрын
양규가 고구려 계, 발해계통인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높겠지만 왕건의 기반인 경기, 강원 황해쪽의 인구가 아무리 많았다 한들 한반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았던 삼남지방보다는 열세였을 겁니다. 이건 삼국시대 때에도 백제의 인구수가 고구려보다도 많은 것으로 기록된 것을 보면 추정이 가능합니다. 일단 농업 생산량에서 비교가 안되었고 고구려는 만성적인 식량, 자원 부족에 시달려 약탈 경제(부경)에 의존해야 했다는 묘사가 중국측 기록에 나옵니다. 당연히 인구수에서도 이런 환경 요인이 영향을 받았을 겁니다.
@lIlIllIIlIlIlllIIlI
@lIlIllIIlIlIlllIIlI 6 ай бұрын
@@hawk8873 삼남의 생산성을 그렇게 과대평가하는 것도 곤란합니다. 한강 대동강 유역은 당시 기준으로도 고조선(대동강), 십제(한강) 시절부터 거의 천 년간 개발되어온 곳이지만 금강 이남 지역은 본격적으로 중앙집권 왕조의 판도 아래에서 개발된 게 못해도 2~3세기는 늦습니다. 그것도 후백제의 중심지인 호남평야는 뻘밭에서 막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었고 영산강 유역 나주평야는 아예 고려에게 넘어가있었죠
@user-bw1dp3fq2f
@user-bw1dp3fq2f 7 ай бұрын
견훤도 참 씁쓸했겠네요.. ㅠ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자기 수족같은 부하들이 잘려나가는모습, 아들이 상대로 서있는모습... 전투 후 바로 사망한것이 이해가 가지요🤔
@user-wl9zb5fu7w
@user-wl9zb5fu7w 7 ай бұрын
일리천 전투 저번에 말해 주셨는데 잘 봤습니다. 후백제의 국력이 그리 고려에 비해 달리지 않아서 엄청난 회전이 벌어졌을 거 같네요. 그 팽팽했던 긴장감을 한번에 무너뜨리는 견훤의 존재감이란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시청 감사드립니다😌 견훤이 인물은 인물이지요😄
@user-hw3ow6qe8u
@user-hw3ow6qe8u 7 ай бұрын
6:50경 나오는 삼층석탑? 멋지네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오 낙산리 삼층석탑입니다😌 kzfaq.info/get/bejne/osmcn9uZpsynqJ8.html
@user-hw3ow6qe8u
@user-hw3ow6qe8u 7 ай бұрын
@@사적돌 답글 감사합니다 주말에 답사 다녀오겠습니다 영상 잘시청하고 있습니다
@user-nn4rv4tu7t
@user-nn4rv4tu7t 7 ай бұрын
구미시 선산읍 일리천전투 후삼국 마지막 전투 입니다 잘 알려져 잇지 않지요 견훤이 금산사에서 도망쳐 왕건에 의탁해 전투에 참전하지요 후백제 견신검이 도망가다가 왕건의 기마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하는곳이 논산 황산벌이라 하더군요 백제처럼 황산벌이 마지막 전투가 아니라 하더군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오 덧글 감사드립니다😌
@hawk8873
@hawk8873 7 ай бұрын
완산(전주)로 도주하지 못하고 황산벌로 퇴각한것은 이미 그쪽길이 막혔고 도주로가 용이해서 그런것 같습니다. 하지만 탈출하려면 차라리 험준한 산지 쪽이 더 성공률이 높았을듯 한데 아마 견신검이 패잔병 수습해서 병력을 꽤 모아서 퇴각하느라 평야쪽으로 도주로를 잡은듯 합니다. 왕건의 추격군을 뿌리칠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황산에서 항복했던 것 같습니다.
@user-fw2hl5vc6n
@user-fw2hl5vc6n 7 ай бұрын
장기전이 벌어지며 혈투를 한 것이 아니고, 특히나 넓은 평원에서 기마병에서 그렇게 차이가 많았다면 허탈한 전투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의문인건 신검도 평생을 전투 곁에서 살았을텐데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하는 점이네요. 견훤왕이 고려로 넘어가고 이미 동요로 전선이 무너지는 상태에서 모 아니면 도를 시전한 걸까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쿠데타한것부터 자기객관화가 안되있던것 같지요, 견훤이 백성들에게 사랑받았고, 군사들도 견훤을 사랑했는데 제대로 된 전쟁수행이될수 없었을것같습니다🤔
@hawk8873
@hawk8873 7 ай бұрын
견신검으로서는 그 방법 밖에는 없었을듯 합니다. 쿠데타로 집권하고 심지어 견훤조차 왕건에게 귀부해버린 상황에서 시간을 끌수록 후백제의 분열이 심각해지는데 이미 견훤의 사위, 박영규등 상당수 호족들이 고려로 넘어갔기 때문에 남은 호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도 대규모 회전을 통한 힘의 우위를 과시하고 나아가서 접전지인 경북 일대를 장악하는 뜻에서 총동원령을 내린듯 합니다. 경남은 거의 대부분 후백제가 접수했기 때문에 대구, 안동 일대가 고려와 치열한 각축을 벌이던 곳이라 이곳을 주전장으로 잡고 마지막 총력전을 벌인 듯하며 사실 선산일대가 평지가 넓긴 하지만 양군 15만명이 격돌하기엔 상당히 비좁은 공간입니다. 어떤 기록에는 유격 기병을 이끌고 후방 우회공격을 했던 고려 태자 왕무(2대 혜종)이 후방의 구릉지를 타고 공격했다는 묘사를 봐서 대규모 기병이 대규모 돌격전을 벌이거나 측면 우회 기동을 했을 공간은 거의 나오지 않았을것 같습니다. 어떤식으로 전투를 했는지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서 생각해볼 여지는 많습니다. 견신검이 왕이 되자 마자 견훤을 죽였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아마 당시에도 그런 논의는 충분히 있었을듯 합니다만 워낙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라 이후 벌어질 일을 생각해서 유폐로 끝냈을 듯하며 그랬으면 아예 남해 고도 같은 경비가 삼엄한 곳으로 유폐지를 정했어야 하는데 견훤이 탈출해버리는 바람에 문제가 커진 것이죠.
@lIlIllIIlIlIlllIIlI
@lIlIllIIlIlIlllIIlI 6 ай бұрын
견훤이 괜히 신검 제끼고 금강에게 왕위 넘길까 고민했던 게 아니죠. 오죽했으면 견훤 끌어내고도 반 년이 넘게 즉위 못했을까요. 민심이고 능력이고 아무런 받침이 안 된 채 그저 적장자의 정통성뿐이었던 거죠
@user-uz4qr8bn8u
@user-uz4qr8bn8u 7 ай бұрын
돈 모아서 사적돌님 타임머신 사드리고 싶다~ 직접 다녀오셔서 얘기 들려주실수 있게...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말씀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타임머신있으면 평생 집에 안들어갈것 같습니다
@user-wm7rw9md8t
@user-wm7rw9md8t 7 ай бұрын
kbs 드라마 클래식 채널에서 태조왕건 200회x5회차 연속방송이 막바지로 가고 있는데 일리천 답사 영상 올려주셨네요 😄😄😄 견훤 고려 귀부 이후에 분위기가 고려로 넘어가고 통일이 눈 앞에 보이자 ' 마지막 전투에 숟가락 얹고 싶었던 지방 호족들의 전투 참가 + 왕건에게 잘 보이기 위한 병력 부풀리기 ' 가 시간을 넘어가면서 더블링 되어서 병력 숫자가 저렇게 나온게 아닐지 ㅋㅋ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ㅎㅎㅎ 고려군에 견훤이 있다면 누가 막을수 있었을까요😄
@winnie_love_honey00
@winnie_love_honey00 7 ай бұрын
후백제가 멸망 이전까지 고려보다는 군사 동원력이 우세였다고 하던데 진짜 후계자 정리 못해서 내분으로 망한거네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견훤이 정치력이 있어서 신라를 끌어안고, 호족들을 포섭했다면 완전히 다른 결과가 되었겠지요.🤔
@jinthree4016
@jinthree4016 7 ай бұрын
그러고 보니 퇴각로가 전주가 아닌 돌아서 가는논산 공주쪽인것 보면 퇴각로가 막혔나봄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전주에 있던 후백제 나성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jjuhyung
@jjuhyung 7 ай бұрын
우리 역사의 대표적으로 큰 회전중에 하나인데 별로 알려지지 않은듯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이전 전투에서 병력수가 수만으로 올라가고 있었지요, 고려시대 들어 본격적으로 수십만병력이 동원되기 시작하니 일리천 전투를 분기점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싶네요🤔
@user-ub6nc4hp2d
@user-ub6nc4hp2d 7 ай бұрын
견훤 성격이 조금만 더 차분하고 침착한 성격이었으면 후백제가 최종 승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텐데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견훤이 정치가의 기질이 좀만 더 있었다면 가능했으리라 생각되지요🤔
@hawk8873
@hawk8873 7 ай бұрын
아마 왕건의 등장이 아니였다면 충분히 가능했을지도,,, 930년 이전까지 후백제는 한반도 거의 남부 전역을 경주 일대, 나주를 제외하고 전부 장악했었기 때문에 고려가 확실히 열세였었습니다. 게다가 왕건은 궁예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했었고 그 과정에서 상당수의 친 궁예 세력들이 후백제에 귀부하는등 혼란이 가중되었던 상황이라 더욱 그러했죠. 불과 6년만에 왕건은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933년 고창(안동) 전투에서 공산 패전의 악몽을 딛고 안동에서 후백제 세력을 구축하면서 936년 선산 일리천 전투에서 후삼국 통일을 이룩하죠. 견훤 나이와 후계자 분쟁 문제만 아니였어도 상황이 어찌 되었을까 궁금해지긴 합니다. 성격은,,, 오히려 창업군주와 군 지휘관의 자질에는 더 부합했을듯하고 경상도 상주 아자개의 아들이면 백제와 전혀 연관이 없음에도 백제의 한을 내세워 빠르게 구 백제 지역을 포섭하여 기반으로 삼은것을 보면 정치력도 만렙 수준으로 보입니다. 다만 후계자 구도 문제에서 너무 독단적인 자세를 보인것과 나이가 문제가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역덕들이 견훤을 호랑이의 기상에 비유하는것이 결코 빈말은 아니죠.
@user-sn4wv4xp1u
@user-sn4wv4xp1u 7 ай бұрын
해평면에 태조가 진을 쳤다는 태조산이 있죠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낙산리 냉산이지요, 도리사도 있고요😄
@user-cp7kl6et2j
@user-cp7kl6et2j 7 ай бұрын
감사합니다 제가 부탁드렸는데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연락처만 알았더라도 답사 오신날 점심 식사라도 하셨음 좋았을것 같습니다 전화번호를 전달할 방법이?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말씀 감사드립니다😌 염려 덕분에 촬영 잘할 수 있었습니다😄 연락처는 열려있습니다
@hereinspiration227
@hereinspiration227 6 ай бұрын
후백제 전라도쪽아니엇나요? 경상도인 구미까지 와서 싸운거에요?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당시 후백제영토는 전북, 전남동부, 경남서부, 충남남부 였지요, 고려와 경주를 잇는 주요교통로가 현재 선산인근이고, 수도는 개성, 안동 의성등이 고려의 요충지였습니다. 따라서 고려를 공략하는 방법은 허리를 차단하는것이고 후백제는 고려군을 끌어내기위해 선산으로 이동했다고보면 되겠지요. 반대로도 마찬가지고요🤔
@user-xm9mp1fx6k
@user-xm9mp1fx6k 7 ай бұрын
09:27 성벽을 이루고 있는 돌들 몇개 샘플 가져다가 중국에서 비슷한 석제 구입해서 복원하면 전주 부근의 백제 산성들은 복원하기 쉽겠네요. 비교적 네모반듯해서 약간만 다듬으면서 넣으면 될듯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시청 감사드립니다😌
@user-ck4lc4eg7l
@user-ck4lc4eg7l 6 ай бұрын
후백제 견훤이 자기가 세운 나라고 아들이 밉다고 나라까지 자기가 망하게 하는 것은 오판입니다.오디랖이 넓은 견훤. 수많은 전쟁에서 왕건에게 패배했죠 그게 백제의 패망 원인이죠 드라마에서 아들탓 하는건 기록의 오해겠죠.유금필에게 쪽도 못쓰는 백제 패잔병들 한심히다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시청 감사합니다😌
@user-mf2dd9eq3j
@user-mf2dd9eq3j 7 ай бұрын
통일신라 금성의인구도 100만으로 보능견해가있죠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경주에 있는 알려진 사지만 200개가 넘으니.. 그 사찰들 부양하는 인구수준이면 분명 많았을것 같습니다🤔
@user-mf2dd9eq3j
@user-mf2dd9eq3j 7 ай бұрын
@@사적돌 백제 멸망당시 76만호 350만이라했고 4세기 근초고왕때 백제 병력 가용이 3만인거보면. 후삼국때도 충분히 가능한 군사라봐야지요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저도 가능한 병력이라는데 좀더 기울어 있습니다😌
@user-ub6nc4hp2d
@user-ub6nc4hp2d 7 ай бұрын
아무리 많아도 100만 까지는…당나라 장안 최대 인구가 100만인데. 물론 당시 세계 top5안에는 들었을거임
@user-mf2dd9eq3j
@user-mf2dd9eq3j 7 ай бұрын
@@user-ub6nc4hp2d 송나라 수도 개봉이 100만인가 그럴걸요. 개경은 10만될거에여
@user-iz7wy7pe6q
@user-iz7wy7pe6q 6 ай бұрын
뭔 고려시대 인구가 700만이 넘어요 ㅋㅋㅋ 이러니 재야 사학자들이 욕을 먹죠 ㅋㅋ 동양의 사서 기록은 과장이 많아서 액면 그대로는 아무도 인정안하죠.. 8세기 민정문서로 추정한 통일신라 인구가 200만 내외인데 당시 농업생산성을 찾아보고 말하세요. 고려시대 인구가 700만이면 동시대 일본 열도보다 많았다는 얘기인데 고려시대 때 혁신적인 농업기술이라도 있었던겁니까?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오 덧글 감사드립니다😌 해당부분 자료수치는 여기서 유용하였습니다.공식적으로 인용이 가능한 자료입니다. encykorea.aks.ac.kr/Article/E0046845
@user-bc8cz6bj7w
@user-bc8cz6bj7w 6 ай бұрын
병력수 10배로 뻥티기 했군 다른 나라들도 뻥은 마찬가지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그랬을 가능성이있지요🤔
@fccargo3468
@fccargo3468 6 ай бұрын
그냥 사극보다 알고리즘으로 구독자가되었는 뭐하시는분인가요? 교수님? 단순역사덕후일리가없는데
@사적돌
@사적돌 6 ай бұрын
회사다니고있습니다😄
@contiguous1
@contiguous1 7 ай бұрын
후삼국 통일전쟁의 피날레~ 여기가 그 유명한 일리천이구낭~~
@사적돌
@사적돌 7 ай бұрын
시대가 바뀌는 순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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