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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이야기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대지의 항구'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하며 승승장구하던 백년설 선생은 1941년 태평레코드에서 오케레코드로 이적하게 됩니다. 백년설 선생의 히트에 힘입어 음반업계에서 입지를 굳혀가던 태평레코드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음반업계의 전속 계약 기간이 통상 2~3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938년 가을부터 태평레코드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백년설 선생의 전속 계약이 막 끝난 시점이었다고 추측됩니다.
이적 당시 오케레코드에서 지급한 축하금과 계약금이 5천 원, 월급이 350원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가치로는 최소 계약금 1억 5천만 원, 월급 천만 원 이상으로 환산해 볼 수 있습니다.
소속사를 옮긴 후 오케레코드의 여러 작곡가들에게서 곡을 받아 녹음을 진행했는데, 박시춘, 김해송, 이봉룡 선생들에게 받은 곡들은 모두 평균 이상의 흥행을 기록합니다. 그중에서도 단연 이봉룡 선생의 '고향설'이 인기를 끌게 되는데 고향을 잃은 민족의 아픔을 눈에 비유해서 그린 곡으로, 우리나라를 넘어 일본, 중국에까지 유명세를 떨치게 됩니다.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는 이 노래를 듣고 복받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고 하네요.
작곡가 이봉룡 선생은 목포 출신으로 가수 이난영 선생님의 오빠이자 함께 활동한 작곡가 김해송이 매부 지간이었습니다. 작사가인 김다인이라는 이름은 아직까지도 그 정체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데 조명암 선생이 '김다인'이라는 필명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장 유력합니다. 조명암 선생은 월북 작가였기에 1952년부터 금지곡으로 지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고향설'은 조명암의 가사가 아닌 반야월 선생이 개사한 버전으로 60년대 초에 다시 발표되기에 이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래의 정확한 가사가 무엇인지도 확인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과정이 어쨌든 백년설 선생의 '고향설'은 역사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14년 선정된 한국 대중가요 고전 33선에서 마지막으로 이름을 올린 노래가 바로 '고향설'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