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밥상 (목요일 저녁 7시 40분 KBS1)
“오감을 사로잡는 향기로운 추억 - 겨울 향채소 밥상” (2016년 2월 11일 방송)
만물이 움츠려드는 하얀 설원의 계절
찬바람을 꿋꿋하게 이겨내는 푸른 채소들이 있다.
눈 쌓인 겨울 땅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것도 모자라 갖가지 향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겨울 향채소들
코끝으로 와서 혀끝을 자극하는 향긋한 유혹!
이 겨울, 오감을 사로잡는 향기로운 추억의 밥상을 만나다.
■ 꽝꽝 언 미나리꽝을 뚫고 나온 산뜻한 추억의 향, 전주 미나리
매서운 겨울, 꽁꽁 얼어붙은 무논에서 만날 수 있는 겨울 향채소, 미나리- 겨울 미나리 한단을 얻기 위해 전주에서 4대째 미나리 농사를 짓고 있다는 홍두표씨는 올해도 꽁꽁 언 미나리꽝의 얼음을 깨는 것으로 이 겨울 미나리 수확을 시작한다. 깨끗한 물이 아니면 잘 자라지 않는 미나리의 고약한 성질 덕분에 두표씨는 지금은 아파트촌이 들어선 전주 선너머 마을에서 이 자리까지 깨끗한 물을 찾아 미나리 농사 터를 옮겨왔다. 미나리꽝이 변두리의 별칭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 그렇게 깨끗한 물을 찾아 변두리로 밀려나고도 별다른 장비가 없던 옛날엔 얼음 물 속에서 맨손으로 미나리를 캘 수 밖에 없었다는데. 전주 미나리 농사꾼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열흘이 멀다하고 돼지를 잡아 속을 든든히 채웠다. 그 시절, 부속고기들은 물론이고 남은 피한방울도 버리지 않고 먹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미나리 피순대. 미나리향이 짙게 밴 미나리 순대는 돼지 잡내를 따로 잡을 필요 없이 미나리를 바닥에 깔아준 채로 삶아주는 것이 비법이다. 귀한 홍어와 미나리를 함께 무쳐먹는 것은 전주만의 특별한 미나리 음식. 이때, 삭히지 않은 홍어로 무쳐야 무침의 주인공인 미나리의 향을 살릴 수 있다. 겨울이면 살이 더 꼬들꼬들해지는 아귀는 겨울 미나리와 함께 탕으로 끓여 뜨끈하게 추위를 달랜다. 꽁꽁 언 미나리꽝에서 더욱 사각해지는 향기로운 추억, 전주 겨울 미나리 밥상을 맛본다.
■ 겨울에 더 톡 쏘는 알싸한 향! 여수 돌산의 명물, 돌산갓
여수 돌산의 겨울은 온통 알싸한 갓향으로 푸르다. 겨울에는 갓이 얼까봐 물을 덜 주는데,
이 때문에 겨울 갓은 향이 더욱 진해진다고. 오늘 갓 수확을 위해 부지런히 밭으로 나선 김정아씨도 돌산이 고향, 톡 쏘는 이 향을 잊지 못해 미술교사일까지 접고 시어머니인 최인자씨에게 손맛을 배우겠다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큰 멸치 배 선장이었던 아버지 배 선원들의 삼시세끼 밥상을 차리다 손맛이 깊어졌다는 인자씨가 제일 잘하는 음식은 갓김치- 아끼지 않고 넣은 양념을 골고루 발라 깨를 살짝 뿌려 한입 맛보면 고소한 맛과 톡 쏘는 향이 한데 어우러져 입맛을 당긴다. 갓 수확도 끝마쳤겠다, 인자씨는 동갑내기 사돈인 영애씨와 함께 손맛 발휘에 나섰다. 갓김치와 갓물김치는 기본! 그냥 시래기를 넣은 것보다 더 맛있다는 갓시래기 장어탕은 인자씨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요리다. 알싸한 향내 폴폴 풍기는 돌산 갓 밥상을 앞에 두니 사돈지간의 우정이 더욱 끈끈해진다.
■ 시린 설원을 뚫고 나와 제철을 맞은 달큰한 향! 진도 대파
흰 눈 쌓인 밭에서 파랗게 자라난 대파 덕분에 농한기인 겨울에도 눈코 뜰 새 없다는 진도의 대파밭- 그런데, 마을 부녀회장인 김수자씨가 대파 수확을 하다 말고 불을 지핀다. 바로 대파를 구워먹기 위해서다. 그저 불 위에 껍질 채 던져놓았다가 새까맣게 탄 껍질은 벗겨내고 새하얀 속살을 한 입 베어 물면 그 맛이 고구마처럼 달다.
제철을 맞아 매운맛은 덜하고 달큰한 향은 일품인 대파를 들고 해방 전부터 대파농사를 지었다는 이 마을 최고령 할아버지 허윤 어르신 댁을 찾았다. 올해 97세인 허윤 할아버지는 사실, 85번째 생일을 맞은 아내 김옥심 할머니를 위해 빨간색 스카프를 선물하는 낭만의 사나이다. 김옥심 할머니의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수자씨와 서희씨가 대파뿌리를 우려낸 물에 조와 쌀, 늙은 호박까지 넣고 대파뿌리죽을 끓인다. 총백죽은 없던 시절 보릿고개를 넘기게 해줬던 고마운 음식, 지금은 허윤 할아버지의 감기를 쫓아주는 최고의 명약이다.
쪽파가 아닌 대파로 담근 김치는 제 스스로가 양념! 대파김치를 냄비 바닥에 깔아 가자미를 올리고 그 위에 대파김치 양념을 부어 끓이면 따로 더 넣을 양념이 없다.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이라는 말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가는 허윤 할아버지와 김옥심 할머니 사이엔 달큰한 대파를 닮은 사랑의 향기가 가득하다.
■ 황량한 겨울 논에서 피어난 씁쓸하고 진한 향! 우리 토종 향채소 순천 곰보배추
겨울을 산다고 해서 동생초, 눈을 본다고 해서 설견초! 하지만 사람들에게 흔히 불리는 이름은 멋없게도 곰보배추다. 그 생긴 모양이 울퉁불퉁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인 곰보배추의 맛은 박하향이 나는 듯 하면서도 씁쓰름한 것이 특징이다. 그 특별한 향 때문에 조리법이 다양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약초에 관심이 많았던 향순씨에겐 더 없이 좋은 식재료라고. 온몸이 종합병원이었다는 남편 병석씨를 위해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향채소로 만드는 요리 실력이 나날이 늘었다는 향순씨. 하지만, 친정 엄마인 금순씨의 생각은 달랐다. 귀하게 키운 딸이 자신의 눈에는 잡초로밖에 보이지 않는 약초들을 캐러 험한 산을 돌아다니니 안타까울 수밖에. 그래서 모녀는 지금도 만나면 티격태격이다. 하지만 향순씨의 손맛은 엄마인 금순씨를 쏙 빼닮았다. 어머니에게 배운 손맛으로 그녀가 제일 먼저 만든 음식은 말린곰보배추밥. 밥으로 먹어도 좋고, 조청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기도 한다고. 곰보배추밥과 함께 먹을 반찬으로는 조물조물 무쳐낸 곰보배추겉절이와 곰보배추를 넣고 끓인 수육. 씁쓸하고 진한 향이 매력인 곰보배추 음식을 먹으니, 겨울한가운데서 봄을 맛보는 듯 깔깔했던 겨울철 입맛이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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